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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 범아프리카회의(PAC) 의장 망갈리소 소부크웨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에게 개정 통행법을 거부하자고 호소했다. 1948년 집권한 극우 국민당 정부가 유색인종에게 주소, 출생지, 부족명, 사진은 물론 지문, 납세번호, 고용주 이름까지 인쇄된 통행증명서 소지를 의무화하자 불복종 운동에 나선 것이다.
약속한 날이 밝자 남아공 전역에서는 통행증을 반납하려는 흑인 원주민들이 ‘인종차별 정책 철폐’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일부 흥분한 군중은 통행증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시위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진행했다.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금광도시 샤프빌에서도 5000여 명이 모여 경찰서로 향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은 경고 방송도 하지 않은 채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69명이 숨지고 186명이 다쳤다. 샤프빌 학살이다.
항의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갔고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대는 장갑차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비밀경찰은 시위 주동자와 참가자 등을 2만 명 넘게 체포해 고문을 자행했다.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남아공 정부는 영연방을 탈퇴하며 강경책을 고수했다. 아프리카국민회의(ANC) 청년동맹 의장 넬슨 만델라는 1961년 무장투쟁조직 ‘민족의 창’(MK)을 결성했다가 이듬해 8월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남아공의 소수 백인 정권은 샤프빌 학살 이후에도 인종 간 결혼 금지, 유색인종 정치 참여 금지, 인종별 거주지 및 공공장소 분리, 부족별 거주지 지정 등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 정책)를 포기하지 않았다. 1976년 6월에는 아프리칸스어(남아공 네덜란드계 백인이 쓰는 독자 언어) 교육 의무화에 반발한 학생들이 소웨토에서 시위를 벌이자 575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국내외의 거센 저항과 압력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남아공은 1989년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ANC를 합법화하고 만델라를 석방하는 등 유화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악명 높던 아파르트헤이트는 1992년 국민투표를 거쳐 폐지됐다. 소수 백인 정권도 1994년 만델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엔은 1965년 12월 21일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을 채택하고 이듬해 샤프빌 시위가 일어난 3월 21일을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로 선포했다. 올해는 샤프빌 학살 65주년이자 인종차별 철폐협약 60주년이다.
우리나라는 1978년 12월 5일 144번째로 비준했다. 인종차별 철폐협약은 가장 많은 나라(182개국)가 가입한 국제인권협약이다. 회원국은 정기적으로 협약상 의무 이행 보고서를 제출하고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심의를 받아야 한다.
인종차별철폐위는 2018년 12월 우리나라 정부가 제출한 제17~19차 통합정기보고서를 심의한 뒤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 △형법에 인종차별적 동기를 가중 요소로 적용 △불법체류자 같은 비하적 용어 폐지 △신속하고 공정한 난민 인정심사 진행 등을 권고했다.
인종차별 철폐협약은 인류가 샤프빌 학살 등의 희생을 치르며 값진 교훈을 얻은 뒤 합의한 약속이다. 국제사회의 노력에 발맞춰오던 우리나라는 이주민의 급격한 증가로 주춤하다가 최근 들어 역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 모두 마음을 가다듬자는 취지로 협약 서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어떠한 우수 인종 학설도 과학적으로 허위일 뿐 아니라 피부색 또는 종족의 기원을 근거로 한 인간의 차별은 국가 간의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관계에 대한 장애물이며 국내 주민들의 조화마저 저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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