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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걸려 감형을"...'9살 사망' 음주운전범이 한 말 [그해 오늘]

박지혜 기자I 2024.07.26 00:02:30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염치없지만 피고인은 현재 백혈병에 걸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라 구금생활을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난해 7월 26일, 이른바 ‘청담동 스쿨존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 고모(당시 40) 씨 측이 항소심 첫 공판에서 한 말이다. 고 씨 변호인은 “잘못하면 7년의 수형이 종신형이 될 수도 있다”라며 감형을 주장했다.

만취 상태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초등생을 차로 쳐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고모 씨가 지난 2022년 12월 9일 서울 강남구 강남경찰서에서 검찰로 구속 송치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고 씨는 2022년 12월 2일 낮 서울 강남구 언북초등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SUV를 운전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당시 9살 초등학생 이동원 군을 들이받고 현장을 이탈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사고 당시 고 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28%, 면허 취소 수준이었다. 사고 목격자는 “차 문이 열려 있었는데 창문으로 술 냄새가 많이 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 씨는 사고를 낸 뒤에도 집까지 운전했고, 검찰은 음주운전과 뺑소니 혐의를 적용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이 스쿨존 음주 사고 양형 기준을 최대 징역 15년 형으로 강화하기로 한 점을 강조하면서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당시 새 기준 적용 전이었지만 이런 변화를 반영해 선고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1·2심 재판부는 고 씨가 20~30m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현장으로 돌아온 점, 소극적으로나마 구호 조치를 한 점 등을 들어 뺑소니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또 ‘하나의 교통사고에서 여러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별개의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1심에서 선고된 징역 7년은 2심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2020년 도입된 이른바 ‘민식이법’은 스쿨존 내 사망 사고에 대해 최고 무기징역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했지만,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21년부터 약 1년 동안 민식이법 관련 판결 226건 가운데 징역형이 내려진 건 전체의 5%인 12건에 불과했다. 형량은 최소 징역 8개월, 최대 징역 5년이었다.

이 가운데 음주운전으로 스쿨존 교통사고를 내 재판에 간 5건이 모두 집행유예를 받으면서 강력한 법이 있지만 법원이 이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2022년 12월 13일 서울 강남구 언북초 앞 스쿨존 음주운전 사고현장을 지나는 학생들이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숨진 이동원 군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고 씨의 음주운전으로 아들 이 군을 잃은 아버지는 올해 2월 29일 고 씨에게 징역 5년이 확정되자 “대낮에 음주운전을 해 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학교 후문 바로 앞에서 하늘나라로 보낸 자가 고작 5년의 형량을 받는 것이 진정 정의냐”고 반발했다.

이어 “법원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판결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며 “동원이의 희생이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 매번 음주운전 사망 사건이 날 때마다 제가 오히려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 군 아버지 질문에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행정·입법·사법부는 아무 대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사법 체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음주측정 시간 지연, 운전자 바꿔치기 등 음주운전 처벌을 피하기 위한 각종 편법이 활개를 치는데도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사고를 낸 뒤 음주운전이 들통 날 상황에서 술을 더 마셔서 사고 전 음주 상태였는지 알 수 없게 만든 가수 김호중 씨 사건을 계기로 ‘김호중 따라 하기’도 속출하고 있다.

온라인에선 김 씨 사건 이후 ‘음주운전에 걸리면 무조건 도주하고,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소주를 마신다’라는 얘기마저 나왔다.

이와 관련해 올해 6월 민형배,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김호중 식 술 타기’ 수법을 막기 위한 도로교통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이에 대한 심사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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