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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초소는 마치 북한군의 초소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제3초소는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오는 북한 측 출입 통로의 초입이었다.
유엔군의 제3초소와 제5초소 사이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성하게 자라나 양 초소의 시야를 가리게 됐다.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유엔사 작업반이 미루나무의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북한군 측이 다가와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 위협하며 경고했다.
한국인 노무자들은 작업을 중지했지만 미군 책임자 보니파스 대위는 작업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11시쯤 북한군 병력은 30여명으로 늘어났다. “죽여”라는 소리와 함께 난투극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도끼를 들고 보니파스 대위에게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함께 있던 베렛 중위도 공격 받았다.
난투극은 4분간 계속됐고 결국 보니파스 대위와 베랫 중위는 병원 후송 중 사망했다. 또 한국군 장교 1명, 사병4명, 미군 사병 4명 등 총 9명이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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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유엔군의 ‘폴버니언 작전’이 시작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된 미루나무를 벌목하는 것이었으나 규모는 단순하지 않았다.
공대지 핵미사일 탑재가 가능한 전투기 20대가 전진배치됐고, 전략폭격기 3대가 괌에서 발진, 오키나와 미군지기에서 전투기 24대가 발진했다. 미해군 7함대와 항공모함을 포함한 6척의 함선이 서해안에서 대기했고, 1만2000명의 병력이 증파하는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이 대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통해 한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64명을 소집해 결사대를 꾸려 미루나무를 자르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했고, 육군 1보병사단 수색대가 인근에 매복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때는 소련과 중국 등 당시 공산권 국가도 ‘미국’을 넘어 ‘유엔’을 공격한 북한과 거리를 뒀다. 당시 소련은 베를린 봉쇄 실패와 더불어 핵무기 경쟁으로 미국과의 전면전만큼은 피하고 있었고, 심지어 당시 소련은 이미 북한을 포기한 상태에 가까웠다. 중국도 문화대혁명의 뒷수습으로 정신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내에서도 예측 못 했던 사고를 중국과 소련이 도움을 줄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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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계기로 JSA 경비 초소는 확실한 경계를 세우고 남과 북의 분할경비로 바뀌었다. 그 뒤 남북한은 충돌을 예방하고자 JSA에서도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여담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미루나무를 자르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했던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