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장 등 치안관계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모두 만류했지만 40대 초반의 상원의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픽업트럭 뒤칸에 만든 연단 위에 성큼 올라선 그의 연설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비보를 전하며 시작됐다. 청중들 속에서 탄식과 비명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상원의원의 연설이 흐를수록 청중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 슬픔 속에서도 귀와 가슴을 열고 그의 말을 차분히 받아들였다.
“(여러분들의)증오와 불신이 불타오르는 충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저도)압니다…우리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분열이 아닙니다. 증오도 아닙니다. 폭력도 불법행위도 아닌 사랑과 지혜, 서로에 대한 연민, 그리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의감입니다…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이 세상의 삶을 순화시키는 것에 헌신합시다”
고(故)로버트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이 7분가량의 이 연설을 한 것은 1968년 4월 4일 저녁.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피살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일정에 맞춰 인디애나폴리스를 찾은 것이었지만 그는 공교롭게도 구름처럼 모인 흑인 청중 앞에서 그들의 영웅인 킹 목사가 백인의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먼저 전해야 했다. 청중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눈 것은 다음 일이었다. 그 자신도 불과 2개월 후 흉탄에 쓰러졌지만…
케네디 의원의 이날 연설을 관통한 핵심 메시지는 분열, 증오, 폭력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 그리고 조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 연민, 정의감이며 이런 감정이 충만한 새 세상을 열어가자는 것이었다. 자신도 형(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총격으로 잃은 아픔을 겪었지만 야만적 폭력과 불법 행위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호소였다. 평화와 공존, 박애의 정신이 가득 담긴 메시지였다.
시계를 55년 뒤로 돌린 2023년의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 근대화를 바탕으로 한국은 국가 위상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리고 국력 또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수준으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나라 안팎의 수많은 조사 기관들 중 이런 견해와 분석에 이의를 다는 곳은 이제 거의 없다. 하지만 정치권으로 범위를 좁히면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저주와 증오의 언어가 난무하고 음해와 비방, 거짓을 앞세운 공격이 판을 치고 있다. 국민을 한데 모으고,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해야 할 정치인들이 말로 가슴을 후비고 분노를 키우는 ‘참극’이 꼬리를 물고 있다. 정치적 내전 상태라는 표현까지 나왔지만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국민의 인내를 끝없이 시험하는 격이다.
정치인들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건 연목구어나 마찬가지이지만 주목할 것은 이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언어폭력이다. 입 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을 ‘깡패, 강도’로 부르는 일까지 생긴 판에 다른 정치인들이 입조심할 리 만무다. 설전이라도 벌어지면 육두문자에 가까운 살벌한 언사가 국회의사당을 휘저으며 언어 오염을 부추긴다. ‘말 전쟁’에 앞장선 의원들에겐 여야 구분이 따로 없다. 공천에 목을 맨 과잉 충성의 인상이 역력하지만 국민 자존심에 입힐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말은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단골 훈수다. 그러나 저질 정치인을 걸러내는 것은 국민의 책무다. 문제는 이런 이들을 심판하고 솎아낼 선거가 아직 1년여나 남았다는 것이요, 정신 바짝 차리지 않는 한 이들의 선동과 거짓에 또 넘어갈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증오와 폭력을 부정하고 사랑과 정의감이 가득한 세상을 열자는 55년 전의 연설이 주는 의미는 여전히 무겁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일 뿐이라는 비판을 들을지 모르지만 오늘의 정치권을 향해 매를 들고 싶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