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강종구기자] 기업어음(Commercial paper;이하 CP)에 대한 기억은 그리 밝지 않다. 우리 경제가 험난한 신용위기를 겪을 때 CP는 단골메뉴처럼 끼어 있었다.
2003년 카드 위기때는 투신사가 갖고 있는 옵션CP가 기폭제의 역할을 했다. 그보다 훨씬 앞선 대우CP는 두고 두고 금융권의 발목을 잡았고, 상당한 손실을 안겼다. 최근의 대호나 코오롱TNS처럼 분식회계의 매개수단으로 많이 이용돼 온 것도 사실이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 유료뉴스인 `마켓플러스`의 (크레딧리포트) 코너를 통해 5월 3일 오후 2시 39분 이미 게재됐습니다)
CP에 대한 신뢰상실은 시장의 급격한 위축을 불렀다. 한국은행 자금순환표를 기준으로 99년 3월 85조원이던 규모가 지난해말 36조원으로 줄었다. 기업 차입수단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이 고작 3.8%에 불과하다.
국제적으로는 우량기업의 단기 자금조달 수단으로 각광을 받는 CP지만 한국에서는 `위험한 물건` 취급을 받았다. 사금융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로 탄생한 태생 탓에 오랫동안 재무상태가 나쁜 기업들의 자금조달 수단이 돼 왔다. 그래서 CP를 자주 또는 많이 활용하는 기업들은 곱지 않은 외부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CP는 더 이상 과거의 회색지대가 아니다"고 선언한 이가 있다. 유명한 크레딧애널리스트인 굿모닝신한증권의 윤영환 연구위원이 그다. 윤 위원은 최근 오랜 산고끝에 내놓은 `CP시장의 오디세이`란 보고서에서 CP가 점점 효율적이고 선진적인 금융상품으로 변해가고 있음에 주목했다.
우량한 등급(A1 또는 A2)의 CP가 전체의 80% 이상을 점하고, ABCP 비중이 45%에 달하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발전의 결과. 미국이나 영국처럼 거래정보의 공유,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신용평가, 유동성지원 약정을 기반으로 하는 `한도거래 구조`를 향해 진정한 변화가 시작됐단다.
이와 함께 그가 주목한 것은 기업 재무정책에서 다루어지는 CP의 모습이다. CP의 취급방식에 따라 기업의 재무정책을 선진과 야만, 효율과 비효율 그리고 과효율, 조화와 오만으로 나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카드와 캐피탈..괄목상대 그리고 만시지탄
카드위기의 한 축은 카드사의 과도한 CP 의존도. 카드위기 직전인 02년말 LG카드와 삼성카드의 CP잔액은 각각 7조5000억원과 4조900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최근 카드사는 CP 의존도가 빠르게 줄었다. 차입경로는 CP에서 회사채와 해외사채(ABS포함)으로 바뀌었다. 올해 들어서는 3년 미만 회사채를 찾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카드사 재무정책의 변화에서 나타난 성공적인 결과다.
캐피탈에 대한 평가는 다소 유보했다. 진도가 카드사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다. 특히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중견 캐피탈사의 경우 극단적일 정도로 단기자금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 신세계의 놀라운 변화..`오만을 버렸나`
최근 재무정책에서 가장 놀라운 변화를 이룩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신세계다. 과거의 신세계는 `과효율`이고 `오만`이었단다. 월말에 자금유출이 몰리는 구조를 감안해도 CP가 너무 많았다고 한다.
워낙 현금동원능력이 뛰어나다 보니 유동비율이 고작 15%이면서도 신용등급은 AA로 초우량기업의 평가를 받았고, 초우량기업인 탓에 CP가 과도하게 많다고 지적해도 시장에서조차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세계의 재무정책이 최근 변했다. CP 발행잔고가 작년말부터 급격하게 줄었다. 투자가 줄어서?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 비록 사모사채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CP가 줄면서 회사채 발행 확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세계가 대표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백화점들도 비슷한 변화를 보였다. 롯데쇼핑은 2004년 중반부터 일찌감치 변했고 현대백화점은 신세계와 비슷한 시기에 움직였다.
◇ LG화학..선진과 효율의 모범 사례
윤위원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정도로 CP를 잘 쓰는 기업은 LG화학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선진`이며 `효율`이고 `조화`에 해당하는 모범사례다.
LG화학의 CP활용은 심심할 정도로 루틴하단다. 백화점과는 반대로 월중 자금이 나가고, 월말에 들어오는 구조라 CP는 월초에 적고 월말로 갈수록 늘어난다. 그러나 이용규모는 2000억원 미만으로 연간매출 7조원이 넘는 LG화학의 자금운용 규모에 비해 많지 않다.
윤 위원은 "CP는 단기적인 자금 과부족을 관리하는데 가장 유용한 상품"이라며 "미국식 한도거래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라고 말했다.
◇ 현대차..기발하지만 찜찜한 독특함
현대차는 지난 2004년말부터 CP를 거래 투신사의 MMF에 연계하는, 사례를 찾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활용법을 보여 주고 있다고 윤위원은 귀띔했다.
거래 투신사가 평소 어느 정도의 MMF잔고를 유지하면서 월말에 일시적으로 몇 배의 단기 CP(만기 1주일 미만)를 인수하는 방식이다. 대개의 경우 이 자금도 인출되지 않고 대기자금으로 남는다.
윤 위원은 "나름대로 기발하고 유용한 모델"이라면서도 찜찜함을 숨기지 않았다. 한도거래방식과 부합하지 않고, 거래 투신사와 돈독한 신뢰유지가 관건이라는 지적이다.
◇ CP가 우습나..일부 공기업
공기업이 대규모 장기자금을 CP로 조달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경영평가를 받는 입장이라 나름대로 재무정책에서도 합리성을 추구한다. 다만 대한석탄공사는 논외로 예외라고 한다. 완전자본잠식상태에서 보여지듯 워낙 부실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CP를 깔고 가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국가스공사, 대한주택공사, 에스에이치공사 등 3곳은 비록 대규모 장기자금을 CP로 끌고 가지는 않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일시적인 자금용도를 CP로 조달하는 인데, 그 규모가 상당히 큰 경우가 많단다.
대한주택공사의 경우 아마도 판교개발을 위한 토지매입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무려 1조5000억원에 달하는 CP를 찍은 적이 있다. 몇달 뒤 공사채를 찍어 CP를 상환했다. 에스에이치공사도 비슷한 사례다.
윤 위원은 "한마디로 CP를 너무 가볍게 취급한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국고보증채무로 신용에는 문제가 없지만 단기자금 조달용인 CP로 신도시를 세울 땅을 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가스공사는 다른 공기업과는 또 다른 색깔을 지녔다. 가스사용량이 늘어 매출채권이 증가하는 겨울철에 CP발행이 집중되다가 여름에 전액 상환되는 구조. 그런데 그 규모가 지난해말 2조3000억원에 달했다.
윤 위원은 "20조~30조원에 불과한 CP시장에서 공기업이 일시에 조단위의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결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며 "시장을 교란하고 민간을 구축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다소의 비용부담이나 절차상의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은행 등 대형 금융기관이 주도하는 신디케이트론을 통하거나 충분한 유동성지원약정을 갖추는 것이 정답"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공기업이 `강자의 절제`를 발휘하지 않아 문제가 된 경험은 이미 2003년 카드위기 당시 비슷한 사례가 있다.
예상치 못했던 카드위기로 CP 시장이 얼어붙던 당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대규모로 CP를 찍어 발행잔액이 2조원을 넘어갔다고 한다. 비록 개혁 과정에서 일시적인 자금부족에 따른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민간을 구축한 사례로 꼽힌다. 당시 CP잔액이 많던 한 대형 백화점은 기술적인 디폴트 상황까지 갔다.
윤위원이 별도로 다루지 않았지만 그 외에도 일시적인 대규모 자금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CP를 발행한 경우는 여럿 있다. 지난해 2분기 SK텔레콤의 대규모 CP발행은 배당금 지급과 관련된 것이고, 한화의 CP증가는 대한생명 인수자금 분할납부와 관련이 큰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윤 위원은 "그 외에도 M&A와의 연관성이 짐작되는 CP증가가 곧잘 관찰된다"며 "우리의 현실에서 수긍할 수 있는 자금조달 방식이지만, 적어도 CP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금시장의 움직임에 따라서는 자칫 화를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