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서 개인전 연 하종현 화백
돈 없어 캔버스 대신 쓴 마대로 거장 반열
천 뒷면에서 물감 밀어내는 '배압법' 방식
60여년 마대작업 집대성한 39점 한자리에
'접합' '이후-접합' '다채색 접합' 진화로
"멈추지 않고 평생 변화한 것 자랑스럽다&qu...
|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하종현 개인전’ 전경. ‘단색화 거장’으로 불리는 하종현 화백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한 39점을 건 전시장, 한쪽 벽면의 두 작품 앞에 한 관람객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왼쪽은 ‘접합 20-90’(2020·162×130㎝), 오른쪽은 ‘접합 21-91’(2021·162×130㎝)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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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종현(87) 화백. 평생 그이가 씨름해온 대상이 있다. ‘마대’다. 흔히들 ‘마대자루’라 부르는 그거다. 과거엔 먹거리를 넣었고 지금은 폐기물이나 담아버리는. 삼실을 소재로 독특하게 만든, 표현만 그랬던 그 주머니가 아니다. 진짜 마대였다. “화가가 무슨? 예술가의 치기 아니야?”
그래, 요즘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국전쟁 직후 보릿고개에 목숨을 내놓던 시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하얗고 빳빳한 캔버스는 그이에겐 감히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우연찮게 발견한, 주둔했던 미군이 버리고 간, 마대는 되돌아보면 다시 없을 횡재였다. 그림이, 아니라면 뭐든 될 것 같았으니까.
시작이 그랬다. 1959년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전도유망한 예비화가’로 불렸더라도 당장은 밥벌이가 더 급한 ‘신진작가’였을 뿐. 화백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원조식량을 담던 마대에라도 그려보자고 시작했다. 그게 1960년대니 평생을 마대와 싸운 셈이다.”
| 하종현의 ‘이후-접합 09-02’(2009·120×200㎝). 마대 대신 나무를 들여 변화를 준 ‘이후-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 길게 잘라내 길이를 맞춘 나무틀을 틈새에 물감을 넣고 접합해, 물감이 삐져나오게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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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이는 마대와 어떻게 싸웠던 건가. 올이 굵고 성긴 삼실로 짠 마대 위에 정상적인 붓질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누가 해도 ‘임파서블한 미션’이 아닌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마대를 펴보고 까보는 궁리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흐느적거리는 마대를 좀 빳빳하게라도 만들어보자, 뒷면에 물감을 칠해보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여지없이 성긴 틈새로 물감이 죄다 삐져 올라올 수밖에.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구나’ 했던 그 순간, 뭔가 보였다. 삐져나온 물감이 만든, 아주 특별한 무늬가 보인 거다. “올이 굵고 억세 마대 위에 그리는 건 어려웠다. 결국 물감을 뒤에서 밀어냈고, 그 작업을 일생에 걸쳐 연구하고 실행했던 셈이다.”
천 뒤에서 두껍게 물감을 발라 앞면으로 밀어내는 ‘배압법’이란 그럴듯한 이름이 생긴 건 한참 뒤였다. 오롯이 혼자 만들고 활용하고 응용한, 마대로 쌓고 세운 화백 자신만의 세계를 다져나갔을 뿐. 하지만 끝이 나질 않는다. 여전히 그이는 마대와 씨름을 하는 중이라니까. 화업 60여년을 다 바쳐 밀어냈는데도 말이다.
| 하종현의 ‘접합 21-51’(2021·117×91㎝). ‘접합’과 ‘이후-접합’에 이어 내놓은 ‘다채색 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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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식량 담았던 마대와 평생을 싸워
‘단색화’의 선구자. 세계 미술시장에 내놓는 한국 현대미술의 사조로 거의 유일하다고 할 그 단색화 부문에 화백은 박서보(91)·정상화(90) 등과 함께 거장 반열에 오른 대표작가로 꼽힌다. 덕분에 원조식량을 담던 마대는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될 형편인데도, 화백은 아직도 ‘마포’를 주재료로 삼아 작업한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연 ‘하종현 전’은 구순을 내다보는 ‘현역’ 작가의 마포작업을 집대성한 자리다. 국제갤러리에서만 세 번째 개인전(2015·2019)으로 꾸린 그곳에 화백은 39점을 내놓았다. 100호(162×130㎝) 규모 이상의 대작이 압도하는 전시에는 1990년대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작업한 작품들을 걸었는데, 그중 2021년 신작만 16점이다.
| 하종현 화백이 ‘이후-접합’ 중 한 작품 앞에 섰다. 2015년, 2019년에 이어 2022년, 국제갤러리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하종현 화백은 “언젠가 자신의 흔적을 모아두고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사진=국제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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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줄기로 가름할 수 있다. 마대 뒤로 물감을 밀어내는 배압법의 오리지널 격인 ‘접합’(Conjunction)이 하나다. 이후 배압법에 진화를 끌어낸 응용버전이 태어났는데 그래서 다른 그 하나를 ‘이후-접합’(Post-Conjunction)이라 불렀다. 또 다른 줄기는 ‘다채색 접합’. 기왓장이나 백자를 떠올리게 하는 무채색 계열의 단색으로 이어가던 기존의 ‘접합’ 연작에 알록달록한 밝은 원색을 입혔다는 게 다른 점이랄까.
‘접합’과 ‘다채색 접합’이 ‘마대와의 씨름’을 이어가며 변화를 추구한 흔적이라면 ‘이후-접합’은 마대 대신 나무를 들인 진화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길게 잘라내 길이를 맞춘 나무틀을 가로 혹은 세로로 접합하는 식인데, 그 틈새에 물감을 넣어 마대 때와는 다른 형태와 힘으로 밀어낸 작업인 거다.
| 하종현의 ‘이후-접합 10-37’(2010·120×180㎝). 마대 대신 나무를 들여 변화를 준 ‘이후-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 길게 잘라내 길이를 맞춘 나무틀을 틈새에 물감을 넣고 접합해, 물감이 삐져나오게 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작품의 부분을 확대한 디테일(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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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갤러리 ‘하종현 개인전’ 전경. 최근에 작업한 ‘이후-접합’ 연작이 나란히 걸렸다. 나무틀 사이로 삐져나온 물감에 주걱으로 날카로운 상처를 만들어냈다. 오른쪽부터 ‘이후-접합 21-303’(2021·91×73㎝), ‘이후-접합 21-203’(2021·61×73㎝), ‘이후-접합 21-501’(2021·91×117㎝)(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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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이 마대를 타고 오른 그 지점에 얹어낸 장치는 우직한 ‘덤’이다. 삐져나온 물감을 바탕으로 그 위에 묵직하게 색을 칠하기도 하고 붓이나 주걱으로 날카로운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 장치가 어떤 것이든 그이의 일생을 관통해온 ‘접합’은 ‘밀어내는 것’, 또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과 긴밀한 연결이었다. 물질과 물질을 만나게 하고, 재료와 행위를 만나게 하는.
◇단색화 거장에서 ‘변화와 진화’의 아이콘으로
모교인 홍익대에서 미대학장(1990∼1994)을 지냈고 서울시립미술관장(2001∼2006)도 거쳤다. 그런데도 그이를 두곤 천생 ‘작가’라 한다. “한자리에 멈춰 있는 게 싫고 평생 변화한 작업이 자랑스럽다”고 하니.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었던 두 차례의 대규모 전시, ‘한국의 단색화’ 전과 ‘회고전’은 어찌 보면 신호탄 같기도 했다. ‘작가 하종현’을 알아보고 작품을 소장한 기관과 아닌 기관을 구분케 하는.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시카고미술관, 홍콩 M+, 도쿄도현대미술관을 돌아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까지, 화백의 작품이 걸쳐 있는 스펙트럼은 그만큼 광범위하다.
| 하종현의 ‘접합 21-96’(2021·227×182㎝). 기왓장이나 백자를 떠올리게 하는 무채색 계열의 단색으로 이어간 가장 대표적인 ‘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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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현의 ‘접합 21-75’(2021·162×130cm). ‘접합’과 ‘이후-접합’에 이어 내놓은 ‘다채색 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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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안 팔린 채 쌓여가는 작품이 걱정이었다면 이젠 “누가 작품을 가져갈까가 걱정”이란다. 언젠가 자신의 흔적을 모아두고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생겼다고 했다. 그런데 어쩌겠나. 그이의 작품은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없어 못 사고 못 팔 만큼’ 귀하다.
지난해 가장 뜨겁고 치열했던 경매시장은 그 한 토막이었다. ‘낙찰총액 30순위 작가’ 중 20위에 이름을 올린 화백은 출품작 35점 중 33점이 팔려나가며 낙찰률 94.29%를 써내기도 했다. 낙찰총액은 27억 2672만원. 8월 케이옥션에서 팔린 ‘접합 96-101’(1996·120×280㎝)이 가장 컸다. 4억 1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아갔다. 같은 달 서울옥션에선 ‘접합 99-13’(1999·120×180㎝)이 3억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올해 1월 케이옥션에선 ‘접합 97-015’(1997·130×162㎝)가 3억 1000만원을 부른 응찰자와 만나기도 했다.
비록 덥석 손에 쥐진 못한다 해도 마음에 소장하려는 이들도 몰리는가 보다. 지난 15일 전시를 개막한 이후 엿새 동안 1860명이 다녀갔단다. 전시는 내달 13일까지다.
|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하종현 개인전’ 중 1990년대와 2000년대 작품을 모아둔 전시장에 걸린 하종현의 ‘접합 06-005’(2006·260×194cm)를 한 관람객이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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