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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시진핑의 체제 강화? 바이든이 중국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중국 예술계는 마찬가지로 지지부진할 거다.”
이 냉소적 발언을 이해하려면 이 작품부터 봐야 한다. 까만 눈을 빛내며 집게발을 지팡이 삼아 비스듬한 하얀 언덕을 열심히 기어오르는 수백 마리의 ‘게’. 뒤집힌 녀석, 방향을 잃은 녀석, 거꾸로 가는 녀석, 친구에게 깔린 녀석, 친구를 올라탄 녀석. 그렇게 바글거리며 언덕 끝에 도달한다고 해도 만날 건 수직으로 각을 세운 벽뿐이다. 어차피 정복할 수 없는 산인데, 저토록 아등바등 덤비고 있는가.
작품명 ‘민물 게’. 2011년 제작했다. ‘갑자기 웬 게 타령이냐’ 하겠지만 사연이 있다. 도자기로 하나씩 빚고 빨갛게 또 잿빛으로 색을 칠해 만든 작품은 2010년 ‘사건’이 계기가 됐다. 중국 상하이시에 의해 작가의 스튜디오가 강제로 철거된 일인데, 그때 작가는 인근 마을주민을 초대해 상하이 명물인 민물 게를 한 상 차려 대접했다는 거다. 그러곤 그 사건을 기억하자며 게를 빚었단다. 중국말로 ‘민물 게’(河蟹·he xie)를 부르는 발음이 중국 정부가 슬로건으로 삼은 ‘화해’(和諧·he xie)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딱’이었다. 국가의 터무니없는 권력과 검열을 풍자하는 소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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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대표하는, 아니 세계가 손꼽는 반체제예술가 아이웨이웨이(64). 애꿎은 게를 데려다가 요리하고 작품으로까지 만든 바로 그다. ‘민물 게’들은 마땅히 깔끔히 포장해 중국 정부에 날리고 싶었을 테지만 그러진 못했고, 대신 한국으로 보내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서울관에 꾸린 ‘아이웨이웨이: 인간미래’ 전에 말이다. 넓은 전시장 한구석, 좁고 경사진 하얀 벽을 타고 오르는 안쓰러운 게들의 제스처에 무언의 항거를 잔뜩 얹어서.
◇12m 대나무인형, 22.5m 구명조끼 뱀…풍자 넘어선 비애
‘미술가’라고 뭉뚱그리기엔 한없이 아쉽다. 화가·조각가·설치작가·사진작가 등 ‘미술계’는 물론이고 영화감독·건축가·사회운동가 등등, 아이웨이웨이에 붙은 타이틀은 한둘이 아니다. 광폭한 행보 덕분이다. 그럼에도 화두는 한결같았다. 어느 자리에 내놔도 그의 결과물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뭉개는 권력’에 대한 저항을 입고 있었으니까. 반체제 활동을 하는 중국 예술가는 적잖지만, 영향력에선 가히 ‘톱 클라스’라 할 만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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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아니 국내 미술관급 전시로는 처음인 개인전이다. 회화·설치·영상·도자·사진·출판 등 120점에 달하는 작품들은 대표작으로 내놓을 만한 깊이로 보나, 십수m는 훌쩍훌쩍 넘기는 규모로 보나, 풍자 이상의 비애까지 적신 메시지로 보나 ‘단순치 않다.’
아이웨이웨이의 위치와 성향을 그대로 내보인 대표작이라면 단연 ‘조명’(2009)이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촬영한 이 셀피는 새벽 5시 경찰에 연행되는 순간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번 개인전에선 대형 컬러프린터물로 인쇄해 미술관 벽에 붙여뒀다.
규모에선 단연 ‘옥의’(2015)다. 12m 길이 대나무인형으로 제작해 층고 10m 이상인 전시장 천장에 매달아뒀다. 중국 한나라 황제의 무덤에서 찾은 ‘옥으로 된 갑옷’에서 유래했단다. 6m 높이로 미술관 앞마당에 세운 ‘나무’(2015)도 있다. 어디서 파내 옮겨온 게 아니라 퍼즐처럼 맞춰낸 조형물이다. 중국 남부 산악지대서 수집한 은행나무·녹나무·삼나무 등 고목의 죽은 가지를 짜맞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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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까지 적신 메시지라면 ‘빨래방’(2016)과 ‘구명조끼 뱀’(2019)을 꼽아야 할 거다. 둘 다 수년간 아이웨이웨이가 파고든 테마인 ‘난민’과 관련이 있다. ‘빨래방’은 2016년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에 있던 이도메니 난민캠프에서 수집한 의류·신발 등으로 ‘제작’한 설치작품. 마치 거대한 세탁소에 들어선 듯 깨끗이 세탁하고 손질한 옷가지를 연령대별로 옷걸이에 걸어뒀다. ‘구명조끼 뱀’은 그리스 남동부 레스보스섬에서 난민들이 벗고 간 구명조끼 140벌을 배배 꼬아 만들었다. 22.5m나 되는 푸르고 붉고 긴 뱀은 전시장을 연결하는 복도 천장을 기어가는 중이다.
◇반체제예술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1957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아이웨이웨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시인이었단다. 문화혁명기에 아버지가 우파로 몰리면서 농촌으로 쫓겨가 가시밭길을 밟은 모양이다. 아들인 그는 대학입학 전까지 ‘변소청소’를 해야만 했다니. 1975년 아버지가 복권된 뒤에야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년 뒤 베이징영화학원 애니메이션과에 입학했고 1981년 뉴욕으로 건너가 현대미술을 접하며 10년을 살았다. 이후 다시 돌아온 중국은 영 편치 않았나 보다. 연신 비판의 목소리를 냈고 정부와 마찰이 불가피했다. 결정적으로 ‘찍힌’ 건 2008년 쓰촨대지진 때였다. 정부발표와 다른, 사망자수와 희생자이름을 기록하며 대놓고 저항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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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의 보복도 시작됐다. 박탈·감시·구금 등. 2008년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설계에 참여한 그를 빼버렸고 2011년 탈세혐의로 81일간 독방에 구금하기도 했다. 일거수일투족 숨소리까지 들여다봤고 여권도 빼앗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렸다. 결국 4년 만에 여권을 되찾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망치듯 모국을 떠나는 일일 수밖에. 2015년 독일로, 요즘 거주한다는 포르투갈까지, 유럽 각국을 떠돌며 살았다. 수년간 그의 관심을 붙들어온 주제인 ‘난민’은 그의 절박함 그 자체였을 거다.
‘도망자니 조용히 숨어지낸다’는 것도 반체제예술가, 아니 아이웨이웨이가 지킬 수 있는 덕목은 아니었다. 블로그·트위터·유튜브·인스타그램 등 디지털 미디어기기를 적극 써가며 활동을 먼저 알리고 나섰다. 물론 그 위에 붙인 한마디도 잊지 않았고. “내 자세와 내 인생의 길이, 난 가장 중요한 아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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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인전에 임박해 언론과 서면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아이웨이웨이는 ‘국제이슈를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질문에 “나 스스로가 국제이슈”라고 대답했다. “내 생명, 생명에 대한 이해, 내가 처한 상황이 세계적 문제의 일부분이라서”란다. 그런 세계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국제이슈’의 미래는, 그리 희망적이진 않은가 보다. “중국 미술계와 중국은 하나”이기 때문이란다. “중국이 직면한 도전은, 갈수록 막강해지는 정치·경제적 힘과 보잘것없는 가치체계로 어떻게 서방 자본주의와 가치체계를 설득하고 정복하느냐에 있다”고 선까지 그었다. 그 도전이 자신과 중국 미술계를 점점 거세게 압박할 거라고. 그러니 어쩌겠나. 이제껏처럼 ‘저항 한 번에 작품 하나씩’, 한동안 그 지난한 과정이 이어질 듯 싶다. 전시는 내년 4월 1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