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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의자 자리에 들인 제프 쿤스 조각…"용기가 필요했다"

오현주 기자I 2021.11.18 03:30:00

[줌인] 치과의원에 전시공간 꾸민 최승호 원장
수익과 직결되는 진료용 의자 빼버리고
진료실 3분의2에 색색 동물조각 들여놔
국내·프랑스 개인소장자 지원받아 전시
"세계적 작품, 쉽게 접하게 한 걸로 성취
쿤스도 예술·일상 경계 허물려 했던 것"

서울 강남구 신사동 치과의원에 들어선 제프 쿤스 조각작품들. 유니트체어(치과 진료용 의자)가 있던 자리를 꿰찼다. 쿤스의 작품만으로 연 ‘너의 풍선을 상상해봐’란 타이틀의 전시에 세운 11점 중 ‘벌룬 멍키 블루’(왼쪽)와 ‘벌룬 래빗 레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강남 도산대로라,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제프 쿤스(66)가 들어선 곳이라니 말이다. 굳이 그가 가진 몸값, 작품의 값어치를 따져보자면, 되레 서울 강남이 만만할 정도인 거다. 그런데 쿤스 작품을 전시한 공간이라고 소개받은 주소지가 말이다. 뜬금없이 어느 치과의원이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마땅히 각이 딱 잡힌 미술관이거나 하얗고 반듯한 갤러리쯤이려니 했으니. 호기심 반 의구심 반, 쿤스의 작품을 보러 나섰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그 치과의원으로.

왕복 10차선 큰 도로 옆으로 줄지어 선 빌딩 중 한 건물의 3층. 계단을 오르는 내내 전시를 알리는 표지는 딱히 없었다. 그렇게 들어선 전시장, 아니 치과의원은 우리가 늘 봐왔던 그대로였다. 웬만해선 들르고 싶지 않은 진료실 풍경 그대로. 그런데 두리번거리는 시선에 문득 색다른 게 꽂힌다. 한쪽 벽면에서 말이다. 반짝거리며 빛을 내뿜는 작은 조각품들이 보이는 거다. 진짜 쿤스의 작품이었다. 기다란 풍선을 접고 꼬아 모양을 만든, 그래서 ‘벌룬’(balloon·풍선)이란 별칭이 붙은, 색색의 동물모양 조각품들이.

치과의원에 들어선 제프 쿤스 조각작품들. 진료실을 채웠던 유니트체어(치과 진료용 의자) 6대 중 4대를 빼내고 전시공간을 만들었다는 최승호 라미치과 원장이 전시작 중 3점을 모은 전시대 뒤에 섰다. ‘너의 풍선을 상상해봐’ 전에는 모두 11점이 나왔다. 그중 ‘벌룬 도그 마젠타’(왼쪽부터) ‘벌룬 도그 오렌지’ ‘벌룬 도그 옐로우’(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치과라는 데가 원체 겁나게 하는 공간이 아닌가.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진정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마치 제 작품인 양 환한 얼굴로 전시작을 바라보던 최승호(51·라미치과) 원장은 병원 분위기를 확 바꿔버린 그 공을 알록달록한 ‘동물 연작’에 돌렸다. 그래도 그렇지, 어쩌다가 진료실에 미술작품을 들일 생각을 했을까.

“경직된 진료환경 어떻게 미래지향적으로 바꿀까”

“요즘 많이들 얘기하는 4차산업을 병원이라고 피해 갈 순 없겠더라. 경직된 진료환경을 어떻게 하면 미래지향적으로 바꿀까 고민해봤다. 문득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문화혜택을 주면 어떨까 싶었다.”

순간 ‘아차’ 했다. 4차산업이란 게 사람의사 대신 AI의사가 진료하는 세상, 미래지향이란 게 아날로그를 지운 자리에 로봇을 세우는 일이라 확신하지 않았나. 그 단단한 고정관념을 이렇게 뒤집어놓다니. 게다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다. 전시공간을 만들고 작품을 들이는 건 어쨌든 ‘산업’과는 거리가 머니까. 아니 되레 ‘생업’을 내놔야 하는 일일 테니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로 꼽히는 제프 쿤스의 조각작품들. ‘너의 풍선을 상상해봐’란 타이틀로 연 전시에 세운 11점 중 ‘벌룬 스완 옐로우’(왼쪽부터) ‘벌룬 도그 블루’ ‘벌룬 바이올렛 래빗’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실 그랬다. 최 원장은 “진료실의 3분의 2를 비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쿤스의 조각 11점을 들인 전시공간은 치과의원 내 ‘유니트체어’(치과 진료용 의자)를 4대나 빼낸 그 자리에 꾸몄다. 평소 남아도는 공간도 아니고, 더 직설적으로 말해 ‘수익과 직결되는 장비’를 품은 공간이었던 거다. 치과의사로 20년, 이 장소에서 14년째 진료를 해왔다는 최 원장의 ‘화끈한’ 결단이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그 결단에 쿤스를 동반자로 삼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처음 연 미니전시가 어떻게 보일까 걱정이 되긴 했다. 정물화나 풍경화 같은 병원용 소품을 걸 게 아니라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임팩트가 있는 작가면 좋겠다고 했더랬다.” 결국 최 원장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한 첫 작가가 쿤스라고 할까.

서울 강남구 신사동 라미치과에 연 제프 쿤스의 전시 ‘너의 풍선을 상상해봐’ 전경. 쿤스는 ‘생존작가 중 가장 비싼 낙찰가로 세계예술계를 흥분시킨’ 현대미술가다. 전시공간은 치과의원 진료실 3분의 2를 비워낸 자리에 마련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환자 위로하는 ‘세계서 가장 비싼 생존작가의 조각들’

쿤스는 현대미술계를 뒤흔든, 영향력으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미국 작가다. 아니 이걸로는 약하다. ‘가장 비싼 낙찰가로 세계예술계를 흥분시킨 생존작가’라는 게 더 낫겠다. 피카소니 모네니,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뺀 ‘살아있는 작가’ 중 판매최고가를 찍었다는 얘기다. 2019년 크리스티경매에서 9107만달러(약 1079억원)에 팔린 ‘래빗’(1986)이 쓴 기록이 그랬다. 반짝이는 외형의 104㎝ 스테인리스스틸 토끼조각이었다.

쿤스 작품세계의 특징이라면 팝아트적 감수성으로 순수예술의 권위에 도전해온 일. 흔히 갖는 조각품의 크기와 무게에 대한 개념도 무너뜨렸다. 긴 풍선을 배배 꼰, 장난감처럼 보이는 작품들은 말랑한 고무 대신 스테인리스스틸이나 자기로 견고함을 입히고 대신 크기를 줄여 소장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냈다. 대중에게 공급할 목적으로 에디션을 붙여 세계시장을 겨냥한 것도 특별한 방식이랄까. 바로 치과의원 전시장에 나온 ‘동물 연작’이 그것이다. ‘벌룬 도그 블루’ ‘벌룬 스완 옐로우’ ‘벌룬 래빗 바이올렛’ ‘벌룬 멍키 레드’ 등 강렬한 원색을 입은 자기 재료의 강아지·백조·토끼·원숭이 등을 나란히 세웠다.

최승호 원장이 제프 쿤스의 조각작품들 뒤에 섰다. 최 원장은 진료공간을 과감히 전시공간으로 바꾸고 쿤스의 작품 11점을 들인 ‘너의 풍선을 상상해봐’ 전을 열었다. 작품 언저리에 진료장비나 칸막이를 그대로 둔 건 “그 자체로 전시 오브제의 효과를 내기 위한 ‘나름의 계획’이었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국내와 프랑스에서 절반씩 개인소장자를 통해 지원과 도움을 받았다”는 이번 전시가 ‘그냥 한 번 해본 일’은 아닌 듯하다. “유니트체어를 빼버린 건 일회성이 아닌 장기적으로 아트공간을 운영하려는 의지였다”고 하니. 개막한 지 25일 남짓, “알음알음 입소문 덕에 서서히 관심이 생기는 중”이라며 최 원장은 또 환하게 웃는다. “더 이상 미술이 ‘그들만의 사치’로 여겨져서는 안 될 거라 싶다. 세계적인 작품을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면 목적은 달성된 거 아닌가. 쿤스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지만, 그도 결국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겠다고 나섰던 이였으니까.”

여전히 격식 갖춘 이들의 고급취향으로 여겨지는 미술전시, 그 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너의 풍선을 상상해봐’(Imagine Your Balloon)로 테마를 정한 의도가 거기 있을까. 전시는 내년 1월 26일까지. 연장 여부나 다음 계획은 ‘관람객 평가’를 십분 반영하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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