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에서 ‘유니콘(Unicorn)’이란 단어가 사용된 건 지난 2013년이다. 벤처투자자인 에일린 리(Aileen Lee)가 10억달러(1조1000억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가진 비상장 스타트업에 비유한 것이 첫 시작이다. 성공보다 실패하는 스타트업이 훨씬 많다 보니 ‘귀한 존재’라는 의미로 붙여진 별칭이다
남의 일로만 여겨지던 유니콘 대열에 국내 기업들이 속속 오르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경쟁력을 갖춘 국내 IT(정보통신) 인프라에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접목하며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K유니콘 등장에 환호하기도 잠시. 국내 유니콘이 해외 자본에 의존한 성장을 거듭한다는 점은 위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국내 유니콘 기업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차기 유니콘 육성을 위해 국내 자본시장도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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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열린 글로벌대체투자컨퍼런스(GAIC) 웨비나는 ‘아시아 유니콘에서 찾는 글로벌 대체투자 기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베이징과 서울을 화상으로 연결해 유니콘 육성을 위한 다양한 이야기가 이뤄졌다.
중국 컨설팅업체 BCC 글로벌의 창 자오 대표와 중국판 포브스로 불리는 ‘후룬리포트’를 발간하는 후룬그룹의 루퍼트 후거워프 회장, 장동헌 행정공제회 최고투자책임자(CIO), 이규홍 사학연금 CIO, 김동환 하나벤처스 대표, 이정호 한양대 교수 등 국내외 전문가들이 김세훈 BCC글로벌 부사장의 사회로 원격 화상토론을 진행했다.
후룬그룹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크래프톤과 무신사 등 10개의 유니콘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영국, 인도에 이어 유니콘 배출국 상위 5개 국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국내 최대 유니콘이었던 쿠팡은 지난 3월 아시아 기업으로는 중국 알리바바 이후 최대 규모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전세계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매력적인 사업 포트폴리오가 늘면서 차기 유니콘 주자들도 차츰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이다.
장동헌 행정공제회 CIO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국내를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 집중하는 흐름이 강해지는 추세”라며 “경쟁력 있는 기업을 조기에 발굴한 뒤 투자를 통해 관계를 맺는 프로세스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쿠팡이 열어젖힌 변화의 물결에 K유니콘의 자본시장 노크까지 활발해진 상황이다. 그러나 이면을 보면 해외 자본이 유니콘 육성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그룹 비전펀드가 대표적이다. 쿠팡에 총 30억 달러를 집행하며 원금 대비 7배 넘는 수익을 확보한 비전펀드는 최근 야놀자에 2조원 규모의 투자 논의에 나선 상황이다.
김동환 하나벤처스 대표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해외 자금을 유치하는 기업이 적었지만 최근 10년 새 대형 AUM(자금운용규모)를 보유한 해외자금이 국내 기업 투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며 “해당 포트폴리오가 유니콘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보면서 자금 규모나 집행 측면에 있어 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넉넉한 자금 유치로 밸류업(가치상향)하는 선례가 쌓이자 국내 기업 입장에서도 해외 자금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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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적 기조 변해야…기업도 기대 부응 선순환” 강조
국내 자본시장이 K유니콘 육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국내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보수적인 투자 기조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장동헌 CIO는 “대체투자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 투자 커뮤니티는 아직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며 “기업 심사 과정에서 성장성보다 재무적 데이터 등에 의존하고 있어 리스크를 동반한 스타트업 투자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규홍 사학연금 CIO도 “최근 시장 흐름을 파악하며 모험투자 비중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자산 성격이나 투자 기간, 자산 배분 등을 고려할 경우 투자에 어느 정도 엄격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해외 연기금이나 국부펀드의 경우 운용자금의 일정(5~10%) 부분을 ‘모험 자산 투자금’로 분류하고 비상장 스타트업 등 포트폴리오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쉽게 말해 ‘다 잃더라도 수십배의 수익을 낼 기업’에 투자하는 섹터를 따로 마련해 놓은 것이다. 의사나 과학자 등 바이오·IT 분야에 능통한 전문 심사역을 배치하고 전문성을 키우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요소다.
자금의 양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질적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벤처투자 성격에 맞는 장기 자금이 들어와야 하는데 금융권이나 PB를 통해 들어오는 자금 거치기간은 1년에서 1년6개월로 짧은 게 현실이다. 최소 몇 년 정도의 인내심이 있는 자금이어야 유니콘 육성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쿠팡의 경우처럼 해외 투자자들은 장기 투자를 전제로 필요할 경우 추가 투자도 단행한다. 투자자로서는 장기 자금이 펀드 AUM을 늘리고 장기 투자로까지 이어지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최근 다양한 특례 상장이나 정부자금이 투입된 정책형 펀드가 등장하는 상황에서 기업들도 그에 걸맞은 성장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김동환 대표는 “자금이나 제도 개선이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기업이 투자 기간 내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자금 유치도 더욱 활발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