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최악 韓日관계 해법 'DJ·오부치 선언'서 찾아야"

이준기 기자I 2019.07.22 04:00:00

[인터뷰]②신기욱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겸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
"오부치 선언, '최악 韓日관계'였던 YS정부 이후 이뤄졌다는 데 주목"
"확전 피하며 냉각기 가져야 …물밑 노력 이후 협상 통해 갈등 해법 찾아야"

사진=신기욱 소장 제공
[뉴욕=이데일리 이준기 특파원] “김대중(DJ)정부의 대북(對北) 햇볕정책 계승자임을 자임하는 문재인정부는 대일(對日) 관계에서도 DJ정부의 원칙과 정신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신기욱(사진 위)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겸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은 20일(현지시간)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DJ·오부치 공동선언’이 전임 김영삼(YS)정부가 옛 총독부 건물 해체 등 대대적인 일제 잔재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면서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을 맞은 후 이뤄졌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금과 같은 최악의 한일 관계 속에서도, 문재인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최선의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1998년 10월 당시 DJ와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도쿄에서 11개 항에 이르는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임진왜란 7년·식민지 지배 36년을 제외하곤 한·일 관계가 비교적 양호했다는 역사인식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미국과의 동맹 등 양국이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 등 국익을 우선순위에 놓고 양국 간 관계의 성격과 영역을 규정한 이른바 ‘DJ·오부치 공동선언’이다. 양국은 이 선언을 계기로 어느 때보다 우호적인 한·일 관계를 구축했었다.

신 소장은 “이 선언을 바탕으로 한 대일정책을 통해 저출산·고령화, 청년실업, 미·중 사이에서의 전략적 협력 공간 확대 등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춰 장기적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문재인정부를 향해 “지금은 양국 모두 국민감정이 격앙된 만큼, 확전을 피하면서 냉각기를 가진 후 본격적인 협상을 통해 적절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며 “우선은 상황이 더 악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물밑 노력을 더 활성화해야 한다”고 재차 조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일 관계가 왜 이 지경까지 왔나.

△이명박(MB)정부 이후 쌓여온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 물밑에서 타협점을 찾아왔던 소위 지한파·지일파 같은 막후 채널이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양국 모두 국민감정이 격앙된 만큼, 확전을 피하면서 냉각기를 가진 후 본격적인 협상을 통해 적절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강제징용 배상판결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할 것 같다.

△작금의 상황은 국내법·국민정서가 국제법·외교논리와 대치하는 형국이다. 한국입장에선 대법원 결정은 사법부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은 징용자들의 개인 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 협정으로 해소됐다고 반박한다. 문재인정부가 1965년 협정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한 후 일본과 협상에 임해야 한다.

-여권에서 연일 대일(對日) 강경발언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배 12척’ ‘국채 보상 운동’ ‘일본 제품 보이콧’ 등 국수주의적 정서를 자극하는 발언이나 행동은 단기적으로 정치적 이득을 가져올지는 몰라도 장기적인 국익과 한국 이미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경제·북한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문재인 정부가 그 타개책으로 일본과의 확전을 꾀하고 있다면 나중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올 것이다. 감정적 반일주의나 일본 원죄론으론 절대로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최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재검토를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 미국을 압박하는 방안으로 생각하는 듯한데 매우 위험하다. 현 정부의 인식은 이 협정이 한국보다는 미·일이 필요해서 이뤄졌기 때문에 압박카드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자칫 한·미·일 삼각 공조를 약화시킬 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 대북문제 등에 있어 미국이나 일본이 군사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한국에 얼마나 큰 손해가 될지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속으로 제일 반기는 나라는 중국일 것이다. 중국은 가급적 한·미·일 삼각 공조를 약화시키려 하고 있는데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될 것이다.

-야당에선 외교안보라인 문책 및 경질을 요구하고 있다.

△‘전투 중에 장수는 교체 않는다’는 말이 있다. 당장 외교안보라인을 경질하는 건 잘못을 시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한 데 대한 책임이 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에는 새로운 팀으로 교체해 심기일전해야 한다.

문재인(왼쪽)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가운데)미국 대통령, 그리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AFP
-트럼프 대통령은 ‘한·일 모두에게서 요청이 있을 경우’에 관여하겠다고 했다.

△역설적으로 한·일 간 갈등이 미국의 이익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 지금 동북아 질서가 혼돈의 상황으로 빠져든 건 미국의 리더십 부재인 측면도 크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동맹관계도 계약관계로 접근한 상황이고, 한·일 갈등은 이러한 상황에서 터졌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에 중재 역할을 기대하긴 어렵다. 최근 미 의회에서 ‘한·일 관계 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것도 행정부 리더십 결핍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이번 주 한·일을 연쇄 방문하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개입에 나설 가능성도 없다는 얘기인가.

△원론적인 이야기는 하겠지만 당장 중재개입에 나서진 않을 것이다.

-‘리얼리티쇼’를 좋아하는 트럼프 극적으로 한일 정상을 만날 가능성은 있지 않나.

△가능성은 작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고 미국이 한국의 손을 들어줄 리는 만무하다.

-한·일 정상 간 ‘담판회동’ 가능성은.

△정상회담은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만났다가는 오히려 상황만 더욱 악화할 수 있다. 지금은 물밑에서 양국이 진지한 협상을 해야 한다. 타협안이 만들어진 후 두 정상이 만나야 한다.

-미국은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나.

△미 국무부는 “대일 청구권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해소됐다”고 보고 있다. 이 조약의 서명국에서 배제됐던 한국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소됐다는 게 미국 정부 내 대체적인 인식이다. 더구나 미국은 일본 원폭에 대해 마음속으로 일정한 윤리적인 부채의식이 남아 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태평양전쟁 이슈를 마무리하고 전후 동북아질서를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미국이 (대일 배상문제와 관련)한국의 손을 들어줄 리가 없다.

-갈등을 바라보는 미국 내 여론은 어떤가.

△반드시 한국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자칫 한국은 국제 조약도 무시하고 국수주의적 감정을 부추기는 나라로 인식될 위험성도 존재한다.

-한·일 간 대미(對美) 외교력 차이도 있을 것 같다.

△워싱턴에는 소위 재팬 핸드(지일파)들이 주요 싱크탱크를 포함해 곳곳에 포진해 있다. 과연 코리아 핸드(지한파)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문재인정부의 친구가 미국 내에 얼마나 되겠는가. 냉혹한 현실을 외면한 채 미국이 한국의 손을 들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국민 여론을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칫 좋지 않은 인상만 미국에 남기지 않을까 우려된다. 문재인정부가 겉으로는 일본과 확전을 하면서 속으로는 미국이 결국 중재에 나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는 듯해 안타깝다.

☞신기욱 소장은…미 학계 내 동북아 국제관계학 최고 권위자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워싱턴주립대에서 사회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 주제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회운동.’ 2001년 스탠퍼드대 인문사회과학대 교수로는 첫 한국인 종신교수로 부임, 2005년부터 아·태 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자문그룹 중 하나로 알려진 이 연구소에는 앤드루 김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 다수의 동북아 국제관계 전문가들이 포진해있다. 2006년부터 연 2회 한·미 정책포럼을 열어 한·미 간 가교 역할을 하는 데 힘쓰고 있다.
사진=신기욱 소장 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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