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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일중 기자]일제 강점기 독립투쟁을 주도하며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하고, 임시정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만주지역에서만 30만명에 달하는 신자를 과시했던 대종교가 지금은 왜 일부 역사연구자가 아니면 잘 모르는 곳이 됐을까. 그것은 이들이 추구한 ‘민족주의’가 일제는 물론이고 광복후 수립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에게도 밉보였기 때문이다.
◇일제, 만주지역 마적단 동원해 학살
‘민족주의’를 내세운 대종교가 나라를 침탈한 일본제국주의와 충돌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최초의 독립선언문인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대종교인들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군사적인 대승을 거둔 후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다.
일제는 중국의 동북군벌정권과 결탁해 1925년 ‘삼시협정’을 맺고 이듬해 만주지역에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렸다. 또한 마적단을 이용해 교인들에 대한 학살에 나서기도 했다.
이후 1942년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은 대종교를 뿌리채 흔들었다.
일제는 함경북도 함흥에서 여학생이 금지된 조선어를 썼다며 체포한 후 이것이 조선어학회 인물의 교육 때문이라며 33명의 한글학자를 체포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이극로가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에게 보내려던 편지 ‘널리펴는 말’을 발견한 일제는 일부 내용을 날조해 ‘폭동을 선동하는 조선 독립선언서’라며 대종교 간부들을 체포했다. 만주에 있던 20명과 국내활동 중이던 4명의 간부들이 체포당했으며, 10명이 고문으로 사망했고 불과 4명만이 1945년 8월 12일 소련군의 만주지역 진입으로 옥문이 열릴 때까지 생존했다.
◇이승만, 처음엔 요직에…‘반공’구실 친일파 기용하며 ‘토사구팽’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수립 과정에서 자신의 민족적 정당성을 대내외에 보여주고자 대종교 소속의 인사들을 국가의 주요 직책에 등용했다.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 문교부장관 안호상, 심계원장(오늘날의 감사원 격) 명제세, 감찰위원장 정인보, 2대 국방부장관 신성모 등이 모두 대종교 소속의 인사들이었다.
제헌국회 내에도 대종교 소속의, 혹은 대종교에 친화적인 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발생한 ‘국회 프락치사건’은 대종교의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줬다. 프락치사건으로 촉발된 ‘반공’ 분위기가 사회·정치적 대세가 되면서 ‘민족주의에 따른’ 좌우합작을 지향하던 대종교의 입지가 줄었고 한국전쟁은 이를 더 가속화했다.
이승만은 1952년 이범석이 이끄는 족청계(조선민족청년단 계열)와 연합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후 바로 배신해 1953년에 전면적인 족청계 축출작업을 벌였다. 결국 족청계가 몰락하면서 대종교는 자신들을 보호해줄 정치적 보루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에 따라 대종교는 재정난, 인물난에 허덕이며 교세를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