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남아메리카 국가 가이아나 정글에 자리 잡았던 ‘존스타운’(Jonestown)에서는 다소 다른 의미로 쓰였다. 이 곳의 교주였던 짐 존스가 신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자살을 연습시킨 행위를 이들은 ‘백야’라 칭했다. 11월18일(현지시간) ‘백야’는 연습이 아닌 실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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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생인 짐 존스는 사회주의와 기독교에 심취했는데 1955년부터는 직접 설교에 나서는 등 목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인종차별 반대와 평화주의, 자유주의 등을 담은 그의 사상은 곧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됐고 많은 신도를 확보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 미국에서 존스는 백인과 흑인을 함께 예배하도록 해 지지를 얻었다. 그는 마약중독자, 노숙자 등 도시빈민계층 구호에 나서는 한편, 성매매 여성과 마약중독자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등 초기에는 평판을 쌓았다.
광적인 믿음을 얻은 존스는 점차 변질됐다. 1960년대 미국의 과격주의 속에 존스는 자신의 교단이 반대파들에게서 공격받고 와해될 것이란 피해의식을 갖게 됐다. 앞서서도 인종통합을 주장하다가 교단에서 내쫓긴 기억이 있었다.
자신을 주목하는 언론이 늘어나면서 존스는 미국을 떠나 남미 가이아나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남몰래 100만 달러를 들여 깊숙한 정글에 땅을 샀고 존스타운 건립계획을 세웠다. 신도들을 꼬셔 1000명 넘게 순차적으로 가이아나로 이주시켰다.
유토피아를 찾아 가이아나에 왔으나 막상 그곳은 강제노역이 강요되는 곳이었다. 교인들은 하루 11시간 30분씩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낙원에 불만을 가진 신도들의 여권을 빼앗았고, 경비병을 세워 탈출을 못하도록 했다.
존스타운에 대한 소문은 미국에도 닿았다. 존스타운에 이주한 신도들의 신변을 걱정한 미국 본토 가족들이 항의하자 하원의원 레오 라이언이 조사단과 기자단을 위시해 가이아나로 떠났다. 그렇게 존스타운에 방문한 날짜가 1978년11월17일이다.
처음에는 조사단을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신도들은 미소를 머금은 채 행복하게 잘 살고있다고 연기했다. 그러나 한 신도가 존스의 눈을 피해 조사단 소속의 NBC 기자에게 존스타운의 실상을 적은 쪽지를 전달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18일 조사단이 다시 존스타운을 찾았을 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존스타운을 떠나겠다는 자원자가 생겼다. 귀국 의사를 밝힌 신도가 15명에 달했다. 조사단이 있던 터라 존스는 이들을 보내주겠다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사단이 미국 본토로 돌아간다면 존스타운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존스는 마음을 바꿔 조사단을 모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포트 카트마 비행장을 출발하려던 라이언 의원을 비롯한 5명의 조사단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현직 의원을 살해한 존스는 수 없이 연습했던 ‘백야’ 의식에 돌입했다. 존스 자신을 포함해 909명이 청산가리를 섞은 음료를 마시고 집단자살했다. 인근 지부에서도 4명이 사망한 채 발견됐다.
그 과정은 더욱 끔찍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음독을 권했는가 하면 자살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주사가 놓여 졌다.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됐던 존스 역시 부검 결과 음독했다.
존스타운의 비극적 사건이 알려지면서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영부인이 가이아나 정부에 존스타운 건설을 돕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미지 타격을 입은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기도 했다.
존스타운의 비극 이후 9년이 지난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1987년 경기도 용인의 한 공장 천장에서 특정종교집단 32명이 사망한 오대양 사건이 그것이다. 사이비 교주가 무리하게 세뇌된 신도들을 이용해먹다가 실체가 드러나려 하자 집단 자살로 마무리 지은 사건이다.
한편 지난 2020년 그룹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가 자신의 곡에 존스의 연설 일부를 삽입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해?’라는 곡의 도입부에는 “당신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 살아서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존스의 연설 10초 가량이 담겼다. 논란이 일자 소속사 측은 사과 입장과 함께 해당 연설을 삭제한 음원을 재발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