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눈에 선하게’(사이드웨이)는 10년간 화면해설방송 대본을 써온 권성아(51), 김은주(46), 이진희(46), 임현아(37), 홍미정(51) 다섯 명의 베테랑 작가가 함께 쓴 직업 에세이다. 이들은 2011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센터에서 화면해설방송 교육을 받은 ‘3기 동기’들로, 이 세계에 입문한 뒤 ‘일하는 기쁨과 슬픔’을 책에 담았다.
최근 서울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홍 작가와 김 작가는 책을 쓴 계기에 대해 “매우 사소하고 단순했다”고 운을 뗐다. 홍 작가는 “일단 코로나19 여파로 여행 다큐멘터리나 예능 방송, 영화 개봉작이 줄어들면서 덩달아 화면해설방송 일도 줄었다”며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우리 일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화면해설작가라는 직업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아마 없으실 거예요. 마침 작년이 화면해설작가에 입문한 지 10년 되던 해였는데 우리 일에 대해 책을 써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바로 실행으로 옮겼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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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작가와 김 작가는 이 작업이 직업으로서 만족스럽다고 했다. 김 작가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일인 만큼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실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시작한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방송글이라는 게 결국 공중에 흩어져버리는 작업인데, 화면해설은 수요층이 명확하다. 그들의 귀에 확실히 가닿아야 하는 화면예술이라는 데 매력을 느꼈다”고 웃었다.
다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화면해설은 그저 ‘좋은 일’, ‘선한 일’ 정도로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이 일이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에서 출발했지만, 여러 이유로 방송을 즐기기 힘든 사회적 약자는 물론, 새로운 방식으로 콘텐츠를 감상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죠. 하지만 갈 길이 멀어요. ‘배리어 프리’(장애인을 위해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제거하자는 것)가 더 확대되어야 하고, 강도 높은 노동 조건도 바뀌어야 합니다.”
베테랑 작가들이지만 매일이 글쓰기 훈련이다. 대사와 음향 사이, 좁은 틈에 효과적인 해설을 끼워 넣느라 머리를 쥐어뜯는 게 일상이다. 저자들은 디테일을 찾는데 애쓴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광적으로 수집하고 같은 장면을 수십 번씩 반복해 돌려보기도 한다. 홍 작가는 “다큐멘터리, 역사극 등을 설명하려면 다양한 배경지식이 필요해 늘 공부해야 한다. 영상의 새 기법이나 새 기술도 익혀야 한다”고 했다.
국내에 첫 화면해설방송이 전파를 탄 건 2001년 4월19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시험 방송을 한 MBC ‘전원일기’(1000)와 KBS ‘일요스페셜’이 시작이었다. 20년이 흘렀는데도 화면해설방송이 낯선 건 절대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두 작가에 따르면 법이 정해둔 화면해설방송 의무 비율은 방송사별로 연간 5~10%에 불과하다. 김 작가는 “국내 방송사에서는 의무 할당량만 채우면 화면해설방송을 중단해버리기도 하는데, 그러면 시각 장애인은 즐겨보던 드라마의 결말을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적용 대상도 아니다.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작업은 뭘까. 댄서들의 춤싸움을 그린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와 같은 댄스 프로그램이다. “오른팔을 들고 깡충 뛴다”는 식의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언어 표현의 한계에 자주 부딪힌다고 했다. 요즘 간접광고(PPL)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웃음을 유발하는 편인데 브랜드 이름을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란다.
“좋은 화면해설은 장애인이 TV를 보는 비시각장애인과 같은 타이밍에 웃는 거예요. 남들은 이미 다 웃었는데 자세한 해설을 듣다가 한 박자 늦게 웃는다면 예능을 보는 의미가 없잖아요. 비시각장애인과 같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홍 작가)
화면해설작가로서 바람도 전했다. 홍 작가는 “시각장애도 전혀 보지 못하는 전맹시각장애, 주변시야가 안보거이나 흐릿하게 보이는 장애 등 유형이 다 다르다”며 “장애 정도에 따라 자세한 해설이 성가실 수 있다. 화면해설이 보편화돼 A버전, B버전을 선택할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작가는 코로나19 이후 화면 속 수어통역사가 익숙해진 것처럼, 화면해설도 일상 속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화면해설 제작이 더 많아져 비장애인처럼 더 다양한 작품을 접했으면 합니다. 저희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대본을 쓸게요. 엉덩이의 힘을 믿거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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