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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구자경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류성 기자I 2015.08.24 02:55:00
[이데일리 류성 벤처중기부장]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 젊은 경영자들과 10만 임직원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자리를 넘기고자 한다.”

구자경(91) LG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95년 2월 그룹 사장단회의에서 회장직을 전격 사임하면서 밝힌 소회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구 명예회장이 한창 원숙한 나이에 총수 자리를 내놓은 이유는 ‘무한경쟁시대에 대비한 세대교체’였다. WTO(세계무역기구)체제 출범 등으로 세계`가 ‘총성없는 무역전쟁’에 본격 돌입하던 시기였다. 불확실해지는 경영환경 속에서 나이 든 경영자보다 젊고 도전적인 경영자가 주도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날 회장직 사퇴를 선언하고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그에게 참석한 임직원들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로 진심어린 존경을 표시했다. 구 명예회장은 현재 충남 천안연암대학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며 분재를 취미삼아 건강한 말년을 지낸다.

그는 모두가 아쉬워할 때 물러나는 결단을 통해 한국 재계에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용퇴(勇退)가 그를 살리고 나아가 조직을 살린 대표 사례다. 그가 은퇴한 지 20년이 흐른 지금, 한국재계는 아직도 살아있는 전설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새삼 구 명예회장을 화두로 꺼낸 것은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노쇠한 신격호(94)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모습을 보면서다. 두 분 모두 기업인으로서 하늘이 내려준다는 거부(巨富)를 쌓으며 대성했지만 결말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한 분은 떠나야 할 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했고, 다른 한 분은 노욕(老慾)으로 평생 쌓은 금자탑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황제 경영’은 세계가 한국경제를 평가절하하는 결정적 이유다. 이번 롯데 사태는 한국재계의 황제경영이 여전하다는 속살을 세계에 다시 한번 보여줬다.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사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논란에 이은 롯데 경영권분쟁에 실망한 국내 투자 외국인들이 하나 둘씩 철수하고 있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줄기는커녕 커지는 형국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황제는 대개 죽는 순간까지 왕관을 벗지 않았다. 황제 생전에 2인자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용서못할 불경죄였다. 이는 황제 사후 권력쟁탈전이 빈발하며 국가의 단명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신 총괄회장도 롯데 황제였기에 권좌는 당연히 죽을 때까지 확고하게 유지될 줄 확신했을 것이다. 롯데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신 총괄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세키가하라 전투’를 빗대며 형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측을 제압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반대파 영주들을 진압하고 마침내 일본통일의 전기를 마련한 대전이다.

신 총괄회장은 실질적으로 절반을 일본인으로 살아왔지만 100년 일본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교훈을 잊고 산 듯하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 이후 1603년 쇼군에 오르며 에도막부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쇼군이 된 지 2년만에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그 자리를 잇게하고 물러난다. 비록 은퇴한 뒤에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지만 그의 용퇴는 자손들이 260여년간 에도막부를 지속하며 지금의 일본 기틀을 다지는 밑거름이 됐다. 만약 이에야스가 죽는 순간까지 쇼군자리를 고집하며 후계자 양성에 소홀했다면 그의 사후 권력쟁탈전은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며 에도막부도 단명에 그쳤을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천년가는 장수기업이 되려면 무엇보다 경영권 승계가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을 평소 가동해야 한다. 황제에게도 치국(治國)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합리적 권력승계 프로세스를 다져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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