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씨 금융거래 내역을 추적하자 사건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실종된 다음날 다방 근처 은행에서 A씨 통장에 있던 저축 약 300만원이 인출됐다. CCTV를 틀어보니 인출자는 A씨가 아닌 의문의 남성이었다. 이어 6월12일, 다시 A씨의 통장에서 500만원이 인출됐다. 이미 A씨는 변사한 채 발견된 뒤였다. 이번에는 신원을 알기 어려운 여성이 돈을 빼 갔다.
돈을 찾아간 남성과 여성은 A씨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됐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시간이 흘러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여기에 발맞춰 경찰은 2015년 미제 전담팀을 꾸리고 A씨 수배 전단을 재배포했다.
미제로 묻힐 뻔한 사건은 시민의 제보로 실마리를 잡았다. 경찰은 제보를 토대로 2017년 3월부터 8월까지 용의자 4명을 체포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5년 만이었다.
CCTV 화면 속 남성은 양모씨. 수사 결과 양씨는 2002년 5월21일 A씨를 납치해 살해하고 마대자루에 넣어 바다에 유기한 것으로 조사됐다. 양씨는 이튿날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하고, 이후 아는 여성을 시켜서 재차 A씨 통장에서 돈을 빼냈다.
사실 양씨가 A씨를 살해한 걸 지목하는 직접 증거는 전혀 없었다. 양씨는 우연히 주운 A씨 가방에 있던 통장으로 돈을 인출한 것뿐이라고 했다. 살인 혐의는 부인했다. 그런데 양씨의 동거녀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물컹한 내용물이 담긴 마대자루 옮기는 걸 도왔다”는 것이다.
검찰은 동거녀 진술 등을 토대로 양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양씨를 제외한 나머지 공범은 사기·사문서위조·위조사문서행사 혐의를 받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양씨는 1심에 이어 2심에서 연달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반전은 3심에서 일어났다. 대법원은 양씨의 무기징역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2심으로 내려보냈다. A씨 살인 사건 범인으로 유력하게 의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닐 수 있는 일말의 여지가 있다는 취지다. 동거녀 진술이 오락가락하고, 공범으로 몰리지 않으려 거짓으로 증언했을 수 있다고 봤다.
제삼자 범행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애초 수사 초기 다방 단골 B씨가 의심을 받았다. B씨는 A씨가 사망 직전에 식사했던 인물인데, 경찰 조사에서 당일 행적을 허위로 진술했다. 공교롭게 A씨가 사망한 이후 연락을 뚝 끊었다. 이후 경찰 수사는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한 이들에게 집중됐고, B씨는 자연스레 용의 선상에서 멀어져갔다.
형사 재판은 ‘증거가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으로’를 원칙으로 삼는다. 범인 열 명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이를 한 명이라도 만들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이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2019년 7월 양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