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호의로 준 김치가 불러온 살인[그해 오늘]

이연호 기자I 2023.05.24 00:03:00

지난해 5월 24일 늦은 밤, 김치 고맙다며 걸려 온 전화
A씨, 동거남 C씨에게 "행동거지 어떻게 했냐"며 2시간 폭언 들어
가정 폭력 지속 시달려...김치 준 사실 알면 폭행 당할까 두려움
A씨, 술 취해 잠든 C씨 살해해 징역 7년...法 "자수, 지속 폭행 등 참작"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김치가 화근이었다. 지난해 5월 24일 밤 11시 55분께. 전북 전주에 사는 A씨(52·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이웃집 남성 B씨의 전화였다.
이미지=연합뉴스.
밤늦은 시각이긴 했지만 B씨의 용건은 간단했다. 며칠 전 받은 김치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기 위한 전화였다. 그런데 이를 들은 A씨의 동거남 C씨(58)는 A씨가 전화를 끊은 후 A씨에게 “어떤 놈이냐, 왜 밤중에 남자한테 전화가 오냐”, “행동거지를 어떻게 했냐”며 거친 욕을 내뱉었다. 이 같은 폭언은 2시간 동안 지속됐다.

사실 A씨는 지난 2015년부터 C씨와 사실혼 관계를 맺어 왔지만 지속적으로 그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이로 인해 A씨는 발가락과 갈비뼈, 척추뼈 등이 부러져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C씨의 상습적인 폭행은 A씨의 지인은 물론 그의 아들까지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112에 신고하기도 했지만 C씨의 행동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행히 2020년부터는 C씨의 폭행이 줄어들었다.

다음 날인 25일 C씨가 출근하자 A씨는 이웃 2명을 집으로 불러 전날 일에 대한 대처 방안을 상의했다. C씨는 퇴근 후 A씨 및 이웃 2명과 함께 술을 마셨다. C씨는 그 자리에서도 “한밤중 남자가 전화했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밤중에 전화하겠냐. 뭔가 반응을 보냈으니 했겠지“라며 화를 냈다. C씨가 술에 취해 잠들자 A씨는 지인 2명과 함께 B씨 집을 찾았다. A씨는 B씨에게 “밤에 뭐 하러 전화했느냐. 나 죽일 일 있냐”고 따졌다.

집으로 돌아온 A씨. 그때 A씨의 뇌를 엄습한 것은 자신이 B씨에게 김치를 준 사실마저 C씨가 알게 되면 또다시 폭행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감이었다. 결국 A씨는 칼을 꺼내 자고 있던 C씨의 가슴을 찔렀다. 결국 C씨는 과다 출혈로 숨을 거뒀고 A씨는 같은 해 6월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을 맡은 전주지법 제11형사부(부장판사 노종찬)는 지난해 10월 “살인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로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어 엄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다만 피고인은 범행 직후 112에 신고해 자수했고, 범행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으며, 형사 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며 A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진료 기록 등 증거를 종합하면 피고인은 피해자에게서 오랜 기간 상습적인 폭언·폭행을 당해온 것으로 판단된다”며 “사건 당일에도 폭언을 당했고 또다시 폭행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발적으로 피해자를 1회 찔렀지만 피해자가 사망해 다소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고 덧붙였다.

A씨와 검찰은 양형 부당을 이유로 모두 항소했다. 하지만 광주고법 전주제1형사부(부장판사 백강진)는 지난 3월 양측 항소를 모두 기각하고 원심을 유지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에게서 당했던 가정 폭력이 직접적인 범행 원인이었다기보다 피해자의 당시 언행으로 촉발된 순간적인 분노와 함께 더 깊은 갈등으로 나아갈 경우 피해자의 평소 성행에 비춰 신체적인 위협을 당할 수 있겠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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