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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자는 숙명여대 재학 중 처음 결혼을 했으나 11년 후 이혼했다. 곧 재혼을 했으나 이때도 9개월 만에 이혼한다. 두 번의 이혼을 통해 받은 위자료를 바탕으로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해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경제는 유통’이라는 소신 아래 사채업을 시작해 곧 사채업계의 큰손으로 성장했다.
숙대 재학 중 메이퀸에 뽑혔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에 화려한 화술을 갖고 있던 그는 타인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늘 자신감이 넘쳤는데 그 내막엔 그의 화려한 인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세 번째 남편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제2차장과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등을 지낸 이철희였다. 그의 형부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처삼촌(영부인 이순자의 숙부)인 이규광이었다.
장영자는 1981년 이철희와 결혼한 이후 돈놀이의 스케일이 달라지는데 남편인 이철희와 대화산업이라는 사채 업체를 차리고 유명 회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한다. 특히 장영자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회사들을 찾아가 은행보다도 더 싼 이자를 제시하며 막대한 규모의 현금을 빌려줬다. 이 과정에서 든든한 뒷배를 이용해 은행에서 거액의 편법 무담보 대출도 동원했다.
돈을 빌려준 기업들에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결코 약속한 기일 내에는 유통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대출액의 2~9배에 이르는 거액의 약속어음을 받았다. 이렇게 받은 어음을 할인해서 생긴 돈을 다른 회사에 빌려주면서 똑같은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받은 어음의 총액은 7111억원에 달했고 이중 6404억 원을 할인해 사용했다. 경력 10년 교사 월급과 국립대 등록금이 50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사기 사건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처가가 얽히며 배후에 청와대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장영자 관련 각종 첩보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정권도 더이상 이 문제를 방관할 수 없었다. 결국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1982년 5월 4일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이들 부부를 구속하며 사건의 전말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은행장 2명과 기업체 간부 등 총 30여 명이 구속됐다. 또 당시 철강업계 2위 일신제강과 도급 순위 8위 공영토건은 부도 처리됐다. 이 사건은 훗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첫해 도입한 금융실명제 논의 본격화의 도화선이 됐다.
장영자·이철희 부부는 이 사건으로 각각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고 약 10년의 수감 생활 끝에 차례로 가석방된다. 하지만 장영자는 이후에도 3차례 더 사기 혐의로 복역과 출소를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