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스웨덴 환경단체 AFII(Anthropocene Fixed Income Institute)는 한국석유공사의 7억 달러 규모 글로벌본드(RegS) 발행에 참여한 주관사 6곳에 서한을 보냈다. 해당 단체는 석유공사가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에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아 탄소발자국 파악이 어렵고, 법적인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캐나다 타르 샌드 생산에 참여한다는 내용이 채권 투자 설명서에 충분히 적혀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금융 시장의 새로운 투자 지침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ESG워싱’에 대한 우려가 짙어지고 있다. 위장환경주의(greenwashing)처럼 진정성 측면에서 실질적인 ESG와 거리가 있으나 ESG 경영이나 투자를 표방하는 것처럼 홍보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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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기준 원화 SRI(사회책임투자) 채권, 이른바 ESG 채권 발행 잔액은 134조12억원으로 집계됐다. 2018년 말 1조3000억원과 비교하면 3년여 만에 무려 100배 이상 늘어났다. 발행사 또한 2018년 말 4개사에 불과했지만 현재 120개사로 대폭 늘어났다.
올 상반기 일반기업의 참여와 녹색채권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발행잔액 기준 SRI채권 전체에서 여전히 사회적채권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지난해 말 대비 올해 들어 사회적채권이 46.64% 늘어나는 동안 녹색채권은 326.86% 증가했다. 그동안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의 발행이 주를 이뤘다면 올해 들어 일반기업으로 발행사가 확장되는 추세다.
발행잔액이 가파르게 확대되면서 ‘ESG워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ESG 시장이 성장하는 만큼 발행사를 향한 기대치와 요구가 더 엄격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에는 모 그룹이 해외 해상 가스전 개발 투자를 이유로 환경단체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새 화석 연료 투자를 포기하기로 했던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 가이드라인·구두 지도 등에도…“갈길 멀어”
위장환경주의 등을 방지하고자 환경부는 지난해 12월 녹색채권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환경부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채권 발행 절차와 자금 사용처, 사업 평가와 선정과정, 자금 관리, 사후보고 등 녹색채권이 갖춰야 할 핵심요소를 규정했다. 녹색사업을 정의하는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 공표도 연내 계획 중이다. 이밖에도 환경부는 녹색채권 발행 시 소요되는 외부검토 비용에 대한 지원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업계 반응이다. “모든 채권의 ESG 채권화”라는 말이 나올 만큼 단기간에 ESG 채권이 빠르게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이드라인이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최근 금융당국은 운용업계를 상대로 ESG펀드 운용에 대한 구두 지도를 하면서 ESG 채권형 펀드에 이름을 붙이려면 자산의 50% 이상을 ESG 상품으로 담도록 했다. 한 운용업계 관계자는 “‘ESG 상품’이 신용평가사로부터 인증을 받은 ESG 채권인지 ESG 등급이 높은 발행사의 채권인지는 해석하기 나름”이라면서 “일부 운용사는 ESG 채권으로 50%를 채우는 전략을 짜기도 하는데, 전체 채권 시장에서 현재 ESG 채권 비중이 10% 수준이어서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고 짚었다.
◇ “외부 검증 통한 사후 보고 강제해야”
업계는 ‘ESG 워싱’ 방지를 위해 외부 검토 및 사후보고 의무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올해부터 ESG 채권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사전 검증과 사전 인증평가를 의무적으로 받아야하는 반면 발행 후 보고서 외부검토는 권고사항이다. 거래소 전용 세그먼트 등록 유지를 위해서는 조달자금 사용보고서가 발행일 다음 연도 연말까지 제출해야 하지만, 등록 취소와 상장 수수료 납부 정도가 불이익으로 돌아간다. ‘셀프 사후 보고’도 가능하다.
기후채권기구(Climate Bonds Initiative·CBI)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11월부터 2019년 3월 사이에 발행된 녹색 채권을 살펴본 결과 외부 검토와 사후보고는 긍정적인 연관성이 있다. 사전 인증과 사후 검토 모두 필요하지만 특히 채권 발행 후 외부검토를 받는 것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분석했다.
유럽연합(EU),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는 느슨한 형태의 공적 규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EU는 2019년 6월 녹색채권표준(Green Bond Standard)을 발표했으며 지난해 7월 녹색채권 관련 분류체계(Taxonomy)를 제정해 법제화를 완료했다. 일본은 환경부에서 2017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녹색채권 관련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투자자부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광열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위장환경주의 리스크는 ESG 채권 투자에서 피할 수 없지만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이라면서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행동주의’ 투자자처럼 자금의 사용 및 프로젝트 진행, ESG 관련한 전반적 이행 내용 등에 대해 발행자에게 적극적인 요구가 필요하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