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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피니 까치 날다…도 화백 장 화백, 봄 데려오셨소?

오현주 기자I 2019.03.11 00:12:00

노화랑 '도상봉·장욱진 전'
정물·풍경 등 솔직담백하게 채운 도상봉
가족·까치 등 동심묻힌 절제미의 장욱진
정서·화풍 닮은 듯 다른 근현대회화 거장

도상봉의 ‘라일락’(1973)과 장욱진의 ‘가로수’(1987). ‘한국 근현대회화의 대가’로 불리는 두 화가는 닮은 듯 다른 작품세계를 이뤘다. 도상봉이 온갖 꽃과 백자, 한적한 고궁 등을 소박하고 현실적으로 채워냈다면, 장욱진은 단순한 절제미를 무기로 나무와 집, 엄마와 아이, 까치와 소 등을 상상으로 빚은 세상에 올렸다(사진=노화랑).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모처럼 어르신들이 ‘떴다’. 한 걸음씩 보폭을 좁히며 전시장 벽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낸다. 그들이 그림인지 그림이 그들인지, 그 전부가 한 데 엉켜 묘한 장면을 만들고 있다.

모를 일도 아니다. 그들을 빼닮은 그림들 때문이다. 백자에 이제 막 움튼 개나리 꺾어 올리고 활짝 핀 라일락을 한 묶음 부풀린 그림. 달인지 해인지 동그라미 하나 올리고 그 아래 집도 짓고 나무도 세우고 소도 키우고 까치도 날리는 그림. 연륜을 닮고, 정서를 닮고, 시절까지 닮지 않았나.

도상봉(1902∼1977)과 장욱진(1917∼1990). ‘근현대회화의 대가’ ‘서양화 1세대’ ‘구상회화의 뿌리’ ‘전통구상화의 거장’. 한국미술사에 굵직한 궤적을 남긴 두 화가를 칭하는 수식은 끝도 없다. 그렇게 시대의 전설이 된 그들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노화랑에 나란히 봄나들이를 나섰다. 거추장스러운 치장 따윈 다 빼버린 담백한 타이틀을 걸고 말이다. ‘도상봉·장욱진 전’이다.

도상봉의 ‘성균관’(1954). ‘도상봉·장욱진 전’에 걸린 도상봉의 작품 중 가장 초기작이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의 전경일 텐데 요즘과는 사뭇 다르다(사진=노화랑).


전시는 두 화가의 그리운 작품 20점을 걸었다. 보고 싶다고 아무 데나 찾아가 볼 수도 없는 걸작들. 누군가의 소유라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작품이 절반 이상이다. 개인소장가와 미술관 등에서 일부러 대여까지 해야 했던, 이른바 상업화랑이 마련한 ‘대형’ 기획전인 셈이다. 보험가액만 30억원이라고 귀띔한다.

‘남는 것 없는 장사’일지언정 기어이 두 화가를 데려다 놓은 이는 노승진 노화랑 대표다. “지난해 가을 ‘청전과 소정 전’ 뒤였다. 서양화로 그들에 필적할 누가 있겠는가를 생각해 봤다”며 ‘기획의 변’을 전한다. 청전과 소정은 근대 수묵화의 정점이란 평가가 늘 따라다니는, 청전 이상범(1897∼1972)과 소정 변관식(1899∼1976)을 말한다. 겸재와 단원에 곧잘 비하는, 경쟁자이자 동료였던 그들의 기획전 역시 노 대표는 ‘남는 것 없는 장사’로 치러냈더랬다. “하고 싶더라 그래서 했고. 할 일을 했다 싶어 뿌듯하더라.”

장욱진의 ‘엄마와 아이’(1989). 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선 들판에 엄마를 바투 좇는 아이의 재기발랄한 몸짓이 뒤에 따르는 소의 느릿한 움직임과 대조를 이룬다(사진=노화랑).


△“모범형 도상봉, 일탈형 장욱진”

비슷한 듯 다르다. 토속적인 색감에 향토색 짙은 정서를 뿌린 분위기는 비슷하다. 하지만 두 화가의 화풍은 전혀 다르다. 서양화의 본질에 순응해 정물과 풍경을 담담하고 고지식하게 담아낸 이가 도상봉이라면, ‘원근 무시, 구도 무시’ 오로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아이의 눈높이로 잡아낸 이가 장욱진이다. 도상봉이 소박한 붓질로 꽃·백자·고궁 등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현실적으로 옮겨냈다면, 장욱진은 단순한 절제미를 무기로 엄마·아이·까치·나무·소가 사는 그이만의 세상을 상상력으로 빚어냈다. 이들을 두고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아카데믹한 모범형 도상봉” “자유로운 일탈형 장욱진”이라고 표현했으니, 대단히 적절한 한줄평이 아닌가.

그런 두 화가를 묶어낸 데는 ‘서양에서 배운 서양화풍’이 아닌 ‘일본에서 공부한 한국적 서양화’란 점이 작용한 듯하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도상봉은 함경보통학교를 나온 뒤 서울 보성고보에서 공부했다. 이후 1921년 일본 명치대 법과에 입학했으나 1년 후 도쿄미술학교로 옮기게 됐는데. 이것이 그를 평생 화업으로 이끈 줄이 됐다. 충청남도 연기에서 난 장욱진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큰 갈등 없이 화가의 길로 나섰던 듯하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니.

도상봉의 ‘개나리’(1975). 백자항아리에 이제 막 움튼 개나리를 꺾어 올렸다. 개나리·라일락·백합 등 도상봉의 꽃잔치에는 늘 백자항아리가 따른다(사진=노화랑).


도상봉의 대표작이라면 단연 ‘라일락’이다. 희귀해서가 아니라 되레 많이 그려 대표작이 된 케이스다. 이런 일화가 있단다. 1970년대 도상봉의 그림이 없어서 못 팔던 시절, 화가에게 ‘라일락’을 요청하는 이들이 줄을 섰더란다. 그런 이들에게 화가는 소리를 빽 질렀다는데. “내가 극장간판쟁이냐?” 그래도 화가는 ‘팬들’의 청을 거절하진 못했나 보다. 한 점씩 여건이 되는 대로 그들의 품에 ‘라일락’을 안겨줬다는 얘기다.

장욱진의 대표작은 사실상 작품 전부다. ‘가족과 까치’가 있으니. 그런데 그 가족 뒤에는 역설적이게도 ‘술’이 있다. 그이의 이름으로 유일한 에세이집 ‘강가의 아틀리에’(1976)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십 년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 버릴 작정이다. 남은 시간은 술을 마시고.” 그림과 술이 전부였던 가장. 그러니 집안 사정은 오죽했을까. 맏딸 장경수(74) 경운박물관장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역할을 못한 것에 죄책감이 있었다. 늘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해 형제들이 아버지를 가엾이 여겼다”고. 장욱진이 가장 많이 그린 ‘가족’은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까치는? 평생 ‘가족’ 곁에 둔 ‘까치’는 어린 장욱진을 미술로 뛰어들게 한 계기였다. 몸이 까맣고 눈만 하얀 ‘까치 그림’으로 ‘전일본소학교학생미전’에서 ‘1등을 먹었다’는 거다.

장욱진의 ‘무제’(1988). 장욱진의 소재·화풍이 한눈에 보이는 작품이다. 해·소·까치·나무·가족 등을 원근·구도를 다 내려놓은 자신만의 세상에 담아냈다(사진=노화랑).


△강한 세상 막아선 약한 그림

전시는 도상봉과 장욱진의 한 시대를 지켜본 10점씩을 내다걸었다. 도상봉에선 ‘라일락’(1973), ‘개나리’(1975), ‘백합’(1957)을 앞세워 ‘고관추경’(1973), ‘고궁풍경’(1973), ‘성균관’(1954), ‘향원정’(1970) 등이 나왔다. 그저 주위의 사물·전경을 인상주의 풍으로 편안하게 그린 작품들이다. 장욱진에선 ‘가족도’(1988), ‘까치’(1979), ‘엄마와 아이’(1989)를 앞세워 ‘가로수’(1987), ‘시골언덕’(1981), ‘자화상’(1973) ‘무제’(1988) 등을 냈다. 작은 토담집에 든 가족, 나무에 오른 까치, 뭉글한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소가 사는, 향토색 물씬한 그림들이다.

비록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말이다. 한낱 붓만 휘둘러 나올 수 없는 그림이란 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터. 화려하고 난해한 영상, 터질 듯 물감잔치를 벌인 평면, 분노와 화가 끓는 입체작품이 시선을 강탈하는 세상에 말이다. 숨죽이게 하는 고즈넉함, 해학에 관조까지 얹은 소소함이라니. 어떤가. 너무 약해 보이나. 하지만 어쩌겠나. 바리케이드 치듯 유리문 하나로 선을 그은 그 안의 세상에 오래 머물고만 싶은 것을. 전시는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노화랑에 펼친 ‘도상봉·장욱진 전’ 전경. 왼쪽이 도상봉의 ‘백합’(1957)이고 오른쪽이 ‘고궁풍경’(1973)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노화랑에 펼친 ‘도상봉·장욱진 전’ 전경. 왼쪽이 ‘자화상’(1973)이고 오른쪽이 ‘엄마와 아이들’(1974)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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