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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 커피잔 속에 바다가 있는 도시, 강릉

이승형 기자I 2013.01.22 06:35:58
문화예술공원 ‘하슬라아트월드’의 ‘바다카페’에서 바라본 정동진 풍경. 이 곳에서 커피를 마시면 바다가 갖고 있는 감성들, 그러니까 노스탤지어의 앙금들을 통째로 품을 것만 같다.
이승형 선임기자


[강릉=이데일리 이승형 선임기자] 몇 달 전, 그녀는 어머니와의 여행지로 강릉을 택했다고 했다. 수화기로 전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지난 4년 간 이어진 긴 병수발에 지쳤을 만도 한데 이따금 생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강릉? 거긴 왜?”

“좋잖아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맛있는 음식도 그렇고. 무엇보다 거긴 커피가 있거든요. 향이 기가 막힌 커피.”

그녀는 암 투병으로 기력이 쇠잔해질대로 쇠잔해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떠났다. 어쩌면 모녀에게는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를 길이었다.

◇ ‘론리 하트 클럽(lonely heart club)’의 도시

언젠가부터 강릉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찾는 도시가 됐다. 경포대에서 게걸스럽게 회와 술을 먹고, 정동진에서 부스스한 아침해를 보는 류의 식상한 관광이 아니었다.

커피, 그 달콤한 ‘쓴 맛’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었다. 이 거대한 ‘동해 다방’은 일찌감치 치유의 시대 맨 앞머리에 있었다. 건조한, 추레한, 수척한, 위태로운, 허망한 마음들을 달래는 다방. 론리 하트 클럽의 도시.

이 곳에서 사람들은 바다를 보며 가슴 속 구멍들을 한 잔의 커피로 메웠다. 실연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는 이들은 두 잔, 세 잔을 연거푸 마셔야 했다. 사랑을 잃은 젊은 베르테르처럼.

그래서 밴드 ‘스위트피(sweetpea:달콤한 콩이란 뜻)’가 노래 ‘강릉에서’를 부른 것은 왠지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마저 든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책장이 사각거리는 듯한 파도 소리를 닮았다.

‘기억하니. 우리 함께했던 그 때 그 바닷가. 그래 그 기억이 아직도 날 설레이게 해. 너에게 말은 안 했지만 난 처음은 아냐. 그래, 하지만 난 우리의 맨 처음을 기억해.’
카페 봉봉방앗간 입구.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이면 입구 문짝에서는 삐거덕 소리가 커진다. 이승형 선임기자


영동 지역에 대설 경보가 내려진 지난 17일 오후 강릉시 명주동의 공기는 푸석했다. 찬란함을 잃은 햇빛은 골목길 어귀를 머뭇거렸다. 지나가던 노인에게 길을 묻자 친절한 답변이 돌아온다.

“이 동네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어요. 그래서 슬로우 시티(slow city)라 부른다오.”

명주동 골목길에는 새 것과 낡은 것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다. 작은 문의 단층 집들이 있고, 소박한 간판 아래 식품점과 철물점, 정육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여기가 커피 골목이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이면 커피 축제가 이 골목길을 중심으로 열린다.

허름한 교회를 새 단장한 공연장 ‘단(端)’ 앞 골목으로 10여m를 걷자 카페 ‘봉봉방앗간’이 보였다. 10년 전 폐업한 방앗간을 인수해 1년 전 문을 연 곳이다.

실내에는 10년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다. 방앗간 시절의 페인트칠 벗겨진 벽과 새로이 칠한 벽이 조화롭다. 영화 제작 일에 종사했던 주인장 김남기 씨의 미적 감각이 공간 곳곳에 커피 향처럼 배어 있다.

“강릉에는 ‘선한’ 커피를 파는 곳이 많아요. 공정무역을 통한 커피는 기본이고, 가격에도 거품이 없습니다. 물론 커피는 맛있습니다.”

봉봉방앗간 바리스타 유미선씨가 필터에 물과 커피를 신중하게 내리고 있다. 이 커피값은 한잔에 4000원이다. 이승형 선임기자


그가 내려준 이디오피아 이가체프 커피를 마셨다. 기운이 나면서 편두통이 사라진다. 적당량의 물이 섞인 분쇄 커피는 특유의 과일 향을 낸다. 아프리카의 향이다. 기름이 둥둥 뜬 흙탕물 같은 맛이 나는 체인점 커피와는 완벽히 다르다.
카페 ‘명주사랑채’. 담벼락에 장 자크 루소의 글귀가 적혀 있다. 루소는 이탈리아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안’의 단골이었다. ‘플로리안’은 유럽 최초의 커피집이다. 이승형 선임기자


봉봉방앗간에서 20여m 떨어진 곳, 이발관 옆으로 난 골목엔 카페 ‘명주사랑채’가 있다. 봉봉방앗간과는 달리 현대식 건물이다. 1층은 보통의 카페이고, 2층은 서재식 카페다. 미니멀리즘 적인 건물 외관과 실내 장식이 골목길 풍경과 제법 어울린다. 명주동에는 이런 작고 예쁜 커피집이 20개가 넘는다.

◇ 해변의 성(城), 하슬라아트월드

3년 6개월전부터 정동진 역과 통일 공원 사이에는 매우 인상적인 공간 하나가 자리잡았다. 하슬라아트월드. 강릉의 옛 이름을 빌려온 하슬라아트월드는 3만3000평의 야외조각공원과 지상 3층, 지하 3층의 건물로 이뤄진, 일종의 문화예술공원이다.
하슬라아트월드의 외관. 26개의 객실이 있는 호텔과 미술관, 레스토랑 등이 이 안에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건물 안에는 미술관과 레스토랑, 카페, 아트샵, 호텔 등이 질서있게 들어서 있다. 모두가 한결같이 바다를 바라본다. 조각가 부부인 최옥영, 박신정 교수는 10년전부터 이 곳을 치우고, 세우고, 닦고, 문지르고, 그리고, 바르고, 다듬으며 만들었다. 조각가가 건축을 조각했다.

이 곳에서 놀라게 되는 것은 웅장한 자연과 건물 속에 숨겨진 섬세하기 그지 없는 ‘디테일’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숲과 길과 천정과 벽과 바닥, 공간 곳곳에 무수한 조형물과 회화들이 매력적인 구도로 앉혀져 있다. 이 안에서는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한다.
하슬라아트월드의 레스토랑 장(張)의 실내. 목각인형과 빈병 모빌이 매달려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공들인 정성은 이 곳 커피에서도 느낄 수 있다. 부부가 직접 볶은 원두를 잘게 부숴 끓인 커피는 예사롭지 않다.

“그러니까 10년도 넘은 얘기인데, 소금강변에서 커피숍을 하던 박이추씨에게 커피를 배웠지요. 그 땐 제대로 된 커피 맛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던 시절인데….”

부부가 내어 준 브라질 산토스 커피를 마시자 남미의 고집스런 향이 입안에 퍼진다. 그 기운이 내면으로 서서히 침잠하자 바다로 향한 창이 더욱 커지는 느낌이다. 괜시리 비틀스의 노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즈(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부르고 싶어졌다.

◇ 커피, 인생 말미에 첨부한 주석

최 교수 부부가 언급한 박이추씨는 국내 바리스타 계보의 3대 명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본에서 커피를 배웠고, 강릉에서 제자들을 길렀다. 그런데 정작 그는 외출할 때 인스탄트 믹스커피를 마신단다. 그는 지금 강릉시 연곡면에서 카페 ‘보헤미안’을 운영하고 있다.

그에게 배운 제자들은 전국에 커피숍을 차렸다. 강릉의 또다른 커피 명소 ‘테라로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은행원 출신 사장 김용덕씨는 커피 산지인 콜롬비아나 케냐 등에 직접 가서 생두를 사올 만큼 정력적인 ‘커피인’이다.
커피박물관 로스팅 기계에서 방금 볶아진 원두를 한 직원이 살펴보고 있다. 이 기계는 한 대에 5000만원을 호가한다. 이승형 선임기자


강릉시 왕산면에는 커피박물관도 있다. 크고 작은 커피나무와 각종 커피 기구 및 용기를 전시한 공간과 로스팅에서부터 추출에 이르는 제조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얼마전 나온 미국발 의학보고서는 흥미롭다. 하루에 커피 넉 잔 정도 마시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우울증 위험이 10% 낮았다. 커피는 아마도 뇌와 심장이 마시는 음료일지 모른다. 마음을 치유하는 약물.

강릉으로 떠난 모녀는 아마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웃으며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부디 무사하게 여행했기를. 두 사람의 마음에 아직도 커피향이 남아 있기를.
눈 내리는 늦은 오후의 커피박물관 입구. 설산을 배경으로 세워진 별장같은 집 4채가 박물관 건물이다. 이승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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