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IPO 시장의 대어(大漁)로 꼽히던 컬리 역시 올 초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을 연기한다고 밝혔다. 작년 10월 이데일리의 IPO 철회 보도에 “사실이 아니다”며 정면 반박한 지 두 달 만에 상장 계획을 번복한 것이다.
증시 악화에 공모주 시장이 동반 위축되면서 IPO 과정에서 “상장철회는 없다”고 자신하던 기업들의 백기투항이 잇따르고 있다. 상장 연기나 철회 이유는 한결같다. 글로벌 거시경제 불확실성 심화에 따른 투자심리 위축을 꼽았다. IPO 일정은 기업의 내외부 사정과 시장 환경에 따라 조절될 수 있지만,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 확대로 인한 투심 위축이 하루이틀 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업의 무형자산인 신뢰성을 해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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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케이뱅크는 지난 6일 증권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아 IPO 연기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케이뱅크의 증권신고서 제출기한이 6일로 정해진 것은 해외 기관투자자 모집 때 적용하는 ‘135일 룰’ 때문이다. 미국 증권법에 따르면 공모 기업은 분기 보고서를 작성한 시점부터 135일 이내에 상장을 완료해야 한다. 올 1분기 상장 추진 기업들은 작년 3분기 결산 자료를 작성한 시점인 같은 해 9월 말부터 135일이 지난 오는 2월 초까지 공모와 납입 절차를 매듭지어야 한다. 수요예측과 일반청약 등의 절차를 고려하면 이달 초에는 공모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135일 룰은 미국 기관투자자들에게만 적용되므로 싱가포르와 홍콩 등 기관 투자자들은 모집할 수 있다. 지난해 9월 20일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의 예심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는 내달 초까지 증권신고서 제출이 가능하다.
케이뱅크는 상장 연기에 대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미국 기관 투자자들의 공모 참여가 어려워졌을 뿐 증권신고서 제출은 아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입장이다.
회사 관계자는 “시장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구체적으로 상장 일정 확정할 계획”이라며 “서호성 행장이 신년사에서 올해 IPO 절차를 추진하겠다고 한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상장철회 없다” CEO 공수표 남발…시장 참여자 피로감 높아져
케이뱅크의 IPO는 큰손인 미국 기관 투자자의 참여 없이 공모 물량을 채우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연기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일각에서는 컬리처럼 증권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케이뱅크의 공모가 산정에 영향을 주는 카카오뱅크 주가가 지난해 60% 가까이 급락해 원하는 공모가를 얻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는 판단에서다.
이경준 혁신IB자산운용 대표는 “카카오뱅크의 현재 주가로는 케이뱅크의 대주주인 KT가 원하는 기업가치가 나오지 않는 게 문제”라며 “케이뱅크는 기다리면 순이익이 늘어나는 구조라 증권신고서를 올리지 않는 방식으로 상장을 미룰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도 케이뱅크의 상장 계획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지난해 원스토어와 밀리의서재는 최고경영자(CEO)까지 나서 상장 의지를 드러냈으나 기관투자자 대상 수요예측에서 참패하자 곧바로 말을 바꿨다. 앞서 IPO에 나선 대어들이 임기응변식 대응에 나선 전례가 있는 만큼 케이뱅크도 무리하게 공모를 추진하지 않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문제는 기업들이 시장 상황을 이유로 손바닥 뒤집듯 IPO를 번복하면서 기업의 무형자산인 신뢰도만 갉아먹고 있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시장 참여자들의 피로감이 계속 쌓여 자칫 투심만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IPO업계 한 관계자는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 투자자들은 기업분석에 적잖은 시간을 투자하는 데, 지난해부터 상장계획을 접거나 연기하는 기업들이 늘면서 들인 노력과 시간이 무의미해져 허탈해 하고 있다”면서 “가뜩이나 얼어붙은 공모주 시장이 더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