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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대한 집착은 기괴한 작품 활동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아내를 죽어가는 사람처럼 연출해 사진을 찍기에 이르렀다. 이 일로 부부는 다투는 날이 잦았다. 이동식은 새로운 모델이 필요해서 평소 다니던 이발소 여직원 A를 대상으로 삼았다. A는 “출세시켜주겠다”는 이동식의 말에 넘어가 누드 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위 일시에 해당 장소를 찾았다.
A는 한겨울 추위를 힘겨워했고, 이동식은 감기약을 건넸다. 감기약처럼 꾸민 독약이었다. 이 약을 먹은 A가 앞서 언급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동식은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사라졌다. 호암산 인근을 지나던 주민의 신고로 A의 주검이 이듬해 1월 발견됐다. 경찰은 탐문을 통해 이동식을 용의자로 특정하고 체포했다.
경찰이 이동식의 집을 압수수색하니 A의 사진이 발견됐다. 이동식이 부인을 찍은 사진도 함께 쏟아져나왔다. 정황이 자신을 옥좨오자 이동식은 “자신은 A를 살해하고 사진을 찍은 게 아니라 숨이 멎은 이후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경찰은 이동식이 사진 촬영 목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수사를 이어갔다.
사건의 단서는 사진에서 나왔다. 사망한 사람 살갗의 솜털은 누워 있기 마련인데, A의 솜털은 서 있다가 누운 것이 드러났다. 사진에 애착이 커서 고가의 장비를 쓴 덕에 고화질의 사진을 생산했고 이게 스스로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동식은 범행을 인정하면서 “A가 불륜 사실을 알린다고 해서 살해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수사기관은 이동식이 사진을 촬영할 목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살인과 시체유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동식은 3심까지 내리 사형이 선고됐다. 1986년 5월27일 이동식의 사형이 집행됐다. 1984년 2월 사형 판결이 확정된 지 2년3개월 만이었다.
이동식은 A에게 가한 범행으로 수사를 받을 당시 전처 행방불명 사건의 용의자로도 의심을 받았다. 이동식 전처는 당시 10년째 실종 상태였다. 전처의 가족은 이동식을 의심했다. 이동식은 전처가 집을 나가고서 사진과 함께 이혼하자는 편지를 보내온 걸 들어 무고하다고 했다. 실종 이후 네 차례나 이사한 이동식의 집으로 편지를 보낸 걸 고려하면 석연찮았다.
전처 실종 사건은 혐의없음으로 종결했다. 당시 사건 수사반장 서기만 씨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이동식이 내게 실토한 (살인) 피해자가 22명이었고 거기에는 이동식의 전처도 포함됐다”며 “‘더 나라 망신시킬 수 없다’며 사건을 빨리 종결하라는 상부의 명이 떨어져 수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일요서울 823호·2010년 2월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