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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재앙이 닥치자 그들은 한국인을 학살했다[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I 2022.09.01 00:03:00

일본 관동지방 강타한 관동대지진 속 일방적 학살 사태
日정부 묵인 속에 일본 자경단 조선인·중국인 무참히 살해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일본 관동지방이 흔들렸다. 사가미 만에서 시작된 지진은 최대 10분 동안 이 지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관동 대지진, 이 지진을 핑계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학살을 가했다. 6600여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각에선 그보다 4배 가량 많은 2만3058명이 사망했다는 집계도 거론된다.

죽창으로 조선인을 살해하는 일본 자경단(사진=연합뉴스)
최대 진도 8.2에 이르는 강진을 시작으로 그 다음날까지 이틀간 진도 6이상의 여진이 15차례나 발생했다. 이틀 내내 땅이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더욱이 점심시간에 첫 지진이 발생하자 목조건물이 대다수이던 당시 일본에 화재도 잇따랐다. 사망자의 90%가 화재로 인한 사망이라는 추산도 있다.

엄청난 재앙으로 정부 조직이 마비되면서 일본 내무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특히 각 지역의 경찰서에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는데 ‘조선인’을 지칭한 대목이 제노사이드의 시발이 됐다. 내무성은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을 하달했다.

혐오는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일부 신문에 해당 내용이 보도됐고 유언비어가 덧붙여져 내용은 더 과격해졌다. 그 내용이 다시 아사히·요미우리 신문 등 파급력 있는 신문에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적개심을 품게 됐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약탈을 일삼고, 우물에 독을 탄다는 헛소문이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퍼져 나갔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자경단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가차없이 살해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의 복식과 다른 복장을 입고 도쿄를 활보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불심검문을 통해 발음이 어색해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자경단은 경찰서 유치장에 숨어있던 조선인들까지 꺼내 살해했다. 경찰조차도 이를 묵인하고 동참했다. 오히려 야쿠자들이 조선인을 보호해준 기록이 있다.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면서 공권력도 긴장했다. 경찰과 군부는 그제서야 자경단의 학살을 적극 제지했으나 이미 조선인과 중국인, 심지어 일본인도 무참한 죽음을 당한 이후였다. 사회에 만연한 유언비어를 일본정부에서 공식 확인했고 질서 유지에도 나섰다. 한편으로는 조선인 피해자의 숫자를 줄였고 기소된 자경단은 증거불충분으로 사법적 책임마저 무마시켜줬다.
관동대학살 소식을 전하는 1923년10월21일자 동아일보(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조선에는 첫 지진이 발생한 지 한 달 반이나 지난 이후에서야 소식이 전해졌다. 1923년 10월 19일자 ‘동아일보’가 ‘流言(유언)의出處(출처)와 各地虐殺狀況(각지학쇄상황)’이라는 제목으로 관련 사건을 보도했다. 그러나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당국의 통제로 인해 학살 사건을 직접적으로 자세히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관동대학살을 두고는 한일 정부 모두 손을 놓고 있다. 일본 정부는 관이나 군의 개입이 없었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19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됐으나 회기가 만료되면서 자동폐기됐다. 1970년대 이후부터 도쿄 도지사들이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때마다 추도문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마저도 2017년 고이케 유리코 지사의 당선 이후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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