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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동에서 부산 거쳐 뉴욕까지 내가 자꾸 동쪽으로 간 이유"

오현주 기자I 2022.04.26 00:02:00

△선화랑서 80번째 개인전 연 작가 김명식
고덕동 옛 고향정경 회상한 ''고데기''서
뉴욕서 만든 ''이스트사이드스토리''까지
집이 사람처럼 보여 20여년 ''연작''으로
1984년 첫 개인전 이후로 쉬지 않은 붓
최근 집바깥으로 시야 넓힌 전...

작가 김명식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전에 건 자신의 작품 ‘컨추리사이드 B01’(2022) 옆에 섰다. 100호(162.2×130.3㎝) 규모 두 점을 붙인 대작은 지난 20여년 간 이어온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연작에서 진화한, 시야를 멀리까지 확장한 버전이다. 80회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 처음 꺼내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희한한 일이었다. 뾰족한 고깔, 아니면 뭉뚝한 모자를 머리에 하나씩 얹은 채 쪼르르 줄 맞춰 서 있는 집과 집. 그들을 보고 있자니 말이다. 빠끔히 눈을 뜨고 입을 앙 벌리고 뭔가 얘기를 하려는 듯한 거다. 드넓은 시골 벌판에 띄엄띄엄 놓였든, 빼곡한 도시 빌딩숲에 여백 없이 붙었든, 환한 낮이든 어둑한 밤이든, 물가든 산비탈이든, 파란색이든 붉은색이든, 대저택만하든 통나무집만하든.

“슬럼프에 빠져 도망치듯 떠난 미국 뉴욕에 머물던 2004년. 어느 날 전철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허망하게 내다보고 있던 그때였다. 멀리서 성냥갑만한 집들이 훅 다가오더라. 마치 누군가의 얼굴들인가 싶었다.”

맞다. 눈과 비, 바람을 다 맞고 선 집들은 마치 세상에 던져진 한 사람, 한 사람처럼 보였다. 지붕은 머리, 창문은 눈, 출입문은 입처럼 보였고. 어디 그뿐인가. 피부색까지 다른 그들은 갈등보단 조화를 외치고 있었다. 짙은 색은 흑인, 하얀색은 백인, 노르스름한 갈색은 동양인이라고 할까.

김명식의 ‘이스트 사이드 J11’(2022·90.9×72.7㎝). 벽에 난 창은 눈, 출입문은 입처럼 보였다는, 작가의 ‘사람 닮은 집’이 뾰족한 고깔을 하나씩 쓰고 나란히 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래, 이제 와 새삼 돌아보니 그랬다. 놓인 환경, 처한 사정, 타고난 모양 따윈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하나하나가 묵묵히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던 거고, 뒤늦게나마 무릎을 탁 치며 그들을 알아봤던 거다. 그렇게 한몸처럼 딱 붙어살 수밖에 없는, 화가와 집의 묘한 동거가 20여년 간 이어졌다. 안으로 들어오겠느냐는 손짓도 없이 멀뚱히 밖에만 세워뒀을 뿐이지만, 화가는 개의치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줄곧 들어줬나 보다. 그러곤 그 숱한 사연에 타이틀을 달아줬다.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East Side Story)라고.

◇데뷔 10년만인 1984년 첫 개인전 이래 80회째

잠시 집 이야기는 접어두고, 화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집 그리는’ 작가 김명식(73)의 스토리 말이다. 그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서 연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전으로 ‘개인전 80회’를 찍었다. 시작은 자연스럽게 첫 개인전으로 거슬렀다.

“얼추 50년이다.” 1974년 미대를 졸업한 이후 줄곧 이어온 화업이 말이다. 촉망받는 젊은 작가였지만 첫 개인전까진 녹록지 않았나 보다. 10년 뒤인 1984년에서야 포스터를 처음 붙일 수 있었다니.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자리했던 신세계화랑에서다. 늦었지만 성공적이었다. 이전까진 한 점도 못 팔던 작품을 그 전시를 시작으로 대놓고 팔 수 있게 됐으니. 전시요청도 빗발쳤다.”

김명식의 ‘이스트 사이드 AU07’(2021·116.8×91.0㎝). 화사하고 알록달록한 색감의 집 그림과는 다른 분위기다. 산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옮겨놨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구상과 추상이 섞인 장르는 그때도 다르지 않았지만 풍경보단 정물에 가까웠다. “휴식 시리즈를 이어갔던 때인데 바이올린을 많이 그렸다. 테이블 위에 악보를 놓고, 벽에는 악기를 기대뒀더랬는데, 편안하고 밝아선지 많이들 찾았다.”

그런데 왜 바이올린을? 그저 ‘집의 탄생’에 기원을 짚을까 해서 물었던 질문에 노화가는 순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아니겠나. “첫사랑이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고백을 처음으로 하게 됐으니.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도 몰랐던 사실”이라며 웃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이 든 정물은 오래가지 못했단다. 그건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거다. “깊이도 없는 그 작업을 잘 팔린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한다는 건, 작가의 양심상 도저히 못할 짓이었다.”

김명식의 ‘고데기 힐 94-1E’(1994·90.9×72.7㎝·왼쪽)와 ‘스틸 라이프 96-13’(1996·72.7×60.6㎝). 1984년 첫 개인전 이후 한동한 이어갔던 테마로, ‘고데기 연작’ 중 한 점과 ‘휴식 시리즈’ 중 한 점이다. 작가의 옛 도록에서 찾아냈다(사진=선화랑).


대신 안 팔리는 ‘고데기 연작’을 붙잡았다고 했다. 바로 여기서 작가인생에 중요한 분기점을 맞았던 건데.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고덕리(지금의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서의 기억을 회상하는 ‘고데기 연작’은 이후 10여년을 이어가며 작가 김명식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던 거다. 산업화네 개발이네 하며 하나둘 스러져간 그 옛 마을풍경을 쓸쓸한 갈색톤의 반추상 계열로 그려냈더랬다. 그 묵직한 작업 덕이었을까. 부산 동아대에 임용(1993)돼 퇴직(2015)할 때까지 가르치는 일과 그리는 일을 병행했다. “태어난 고향이 어느 날 없어졌는데 그 충격이 어땠겠나. 그런데 14, 15년 ‘고데기 연작’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딱 막히는 느낌이더라. 한계를 맞은 거다.”

2000년대 초반 뉴욕으로 떠난 건 그 때문이다. “한 달에 1000달러 남짓 받는 해외파견교수를 지원했다. 2년간 뉴욕에 머무르며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연작’의 탄생을 봤다.” 차창 밖으로 눈과 입을 가진 집들이 달려들던, 바로 그날 그 장면을 말하는 거다.

김명식의 ‘이스트 사이드 MS03’(2022·116.8×91.0㎝·왼쪽)과 ‘이스트 사이드 JU03’(2022·91.0×116.8cm). 닮았지만 같은 집은 하나도 없는 제각각의 집들이 만든 풍경들. 세상에 던져진 한 사람, 한 사람과 다를 게 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눈·입 달린 집 그림이 진화한 ‘초록 전원풍경’

80회째인 개인전에선 또 한 번 진화한 풍경을 꺼내놨다. 알록달록한 집 그림의 배경으로 시원한 초록의 전원을 앉히고 ‘컨추리사이드’(Countryside)란 연작 타이틀을 붙인 건데. 30점 전시작 중 10여점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적잖다. 퇴직 이후 용인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바라본 전경이라고 했다. 그간 집에만 집중하느라 가둬둔 시선을 ‘줌 아웃’해 멀리 확장했다고 할까. 이제야 화면에는 그간 미처 보지 못한 논과 밭, 길과 나무, 산이 찼다.

“시골에서 태어나 흙에서 자랐고, 결국 농사짓기 싫어 도회지로 도망했던 게 아닌가. 청년·중년을 다 보내고 노년에야 다시 흙으로 돌아간 거다.”

작가 김명식이 선화랑 개인전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건 자신의 작품 ‘컨추리사이드 MA10’(2022·162.2×130.3㎝) 앞에서 초록전경 속에 묻힌 작은 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래선가. 노화가의 붓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내친김에 미국 마이애미 디아스포라 바이브 갤러리에서 8월부터 여는 그룹전에도 나설 예정이다. 2개월간 중남미작가 9인과 함께할 전시테마는 ‘정체성의 깊이: 기억과 아카이브로서의 예술’(The Depth of Identy: Art as Memory and Archive). 작가는 ‘이스트 사이드’ 2점, ‘컨추리사이드’ 1점 등 100호 작품 3점을 보내기로 했다.

“돌아보면 ‘이스트’(동쪽)가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데기’를 만든 서울의 동쪽 고덕동도 그랬고, ‘이스트 사이드’를 만든 뉴욕도 미국의 동쪽이 아닌가.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가르치고 작업했던 부산도 한반도의 동쪽. 그 숙명을 잡고 자꾸 동쪽으로 찾아간 셈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 연 김명식의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전 전경. 왼쪽부터 ‘컨추리사이드 B01’(2022·162.2×260.6㎝), ‘이스트 사이드 MM01’(2022·116.8×91.0㎝), ‘컨추리사이드 JA03’(2022·162.2×130.3㎝)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말이 좋아 운명이고 숙명이지, 결국은 그이가 다한 일이다. 참으로 부지런히 달려온 세월이 아닌가. 1984년부터 38년간, 단순히 셈으로만 따져도 한 해에 2회 이상이어야 80회 개인전이란 게 가능하니까. 수시로 있었을 단체전이며 아트페어 등은 다 빼놓고서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그이는 “80회란 숫자가 그리 중요하진 않다”고 했다. “잘 되든 안 되든 꾸준히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어차피 좋고 나쁘고는 나중에 평론가가 챙길 일이 아닌가. 다른 거 없다. 그림은 그리는 거다. 물감을 아끼지도 말고 물감을 굳히지도 말고.”

선화랑 전시는 30일까지다. 이후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81번째 개인전을 이어간다. 수영구 광남로 미광화랑에서 여는 ‘김명식 전’(5월 20일까지). 동아대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 8년 만에 여는 부산전이란다. 탁 트인 초록의 전원에 앉힌 눈·입 선명한 집들을 데리고 다시 동쪽으로 간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 연 김명식의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전 전경. 한 관람객이 ‘사람 닮은 집’ 앞에 서서 오래 머물렀다. 왼쪽부터 ‘이스트 사이드 AU07’(2021·116.8×91.0㎝), ‘이스트 사이드 JA15’(2021·72.7×60.6㎝), ‘이스트 사이드 MS08’(2022·162.2×130.3㎝)이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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