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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더듬어보면, 그랬다. 하느라고 했던 거다. 배운 대로 그리고, 느낀 대로 표현했다. 충직하게 붓을 움직였고 치열하게 덤볐더랬다. 그러니 그 참담한 결과가 작가 탓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짐은 온전히 작가의 어깨에 얹혔다. “500호, 700호를 준비할 만큼 열의를 다했던 개인전이었는데 한 점도 못 팔았다. 그 큰 그림을 다 끌고 돌아와 아파트 안방에 세워뒀는데, 참 우울하더라.”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붓을 잡아야 하는 이유보다 붓을 잡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늘어났던 거다. 급기야는 병까지 생겼다. “다시는 그림을 못 그리겠구나” 했다. 그래도 일상의 하루는 오고 갔고,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30년이 지나 있었다. 순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단다.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 기회란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 5∼7년 전쯤일 거다. 그림으로 돌아가자 결심을 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무거웠을 그 붓을 그이는 다시 들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 작가 최명애(71)가 개인전을 열었다. 1990년 그해 그 전시(‘달리는 사람들’ 전) 이후 처음이니, 무심하게 센 햇수로도 32년 만이다. 전시명은 ‘그린 데이즈’(Green Days). 굳이 의미를 풀자면 ‘살아 있는 날들’쯤 되려나. 그 타이틀답게 화사하게 붓길을 낸 화면들이 시선을 바쁘게 이끈다. 그간의 무거운 침묵이 녹아 여기저기 번들거릴 만도 한데, 때론 새털처럼 가볍게 때론 나무처럼 굵직하게 그어낸 선과 면은 그저 싱그럽다, 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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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은 모두 25점. 작업실에서 작가가 들고 나온 작품이 40여점이라니, 도록에 이미지만 싣고 미처 못 건 작품도 15점이나 된다.
◇‘행동하는 무채색’이 ‘살아있는 빛·색’ 되기까지
숲을 통해 들여다본 세상이야기. 근래 작가의 작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거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바위가 있다. 또 바람도 있고 계절도 있고 기억도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추상이란 언어로 작품 속에서 대화를 하는데, 슬쩍슬쩍 구상의 형체를 내비치기도 한다.
“처음부터 추상을 했다. 내 성향에 구상보단 추상이 맞았다.” 그런 그이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면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다니던 시절의 은사였다는 유경채(1920∼1995) 교수와 정창섭(1927∼2011) 교수를 꼽아야 한다. 한국 현대미술 1세대라 할 두 화백은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기도 했다. 정 화백은 한지와 추상미술을 결합하는 시도로 ‘닥의 화가’로 불렸고, 류 화백은 진한 감성을 깔고 시간·계절·자연의 흐름을 옮겨내는 한국적 추상화의 길을 텄다. 하지만 정작 그이의 그림은 스승의 길을 곧게 따르진 못했다. “당시 사회적 이슈들”이 발목을 잡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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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든 게 불안하던 시절, 젊었던 작가는 일상에 늘 묻어나는 그 불안을 캔버스에 옮겨냈더랬다. ‘행동하는 무채색’이란 표현이면 그 시절이 설명되려나.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믿었던 거다. 그 ‘기능’을 그이가 말 속에 섞어냈듯 500호, 700호로 펼쳐냈다고 하니. “그 시대의 흐름을 어둡게 묘사한 작품들이었는데, 화단에는 안 먹히고 개인적으로는 우울하고. 그래서 젊은 나이에 암까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번 개인전만 본다면 어찌 그 시절을 상상해낼 수 있을까. 노랗고 빨갛고 파랗게 입힌 ‘자연’들이 갤러리의 하얀 벽면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지 않은가. 폭발하듯 번져 낸 자연의 색이라니.
“경기 과천 관악산 밑에 집과 작업실이 있다. 덕분에 요즘도 한 주에 한 번씩은 관악산에 오르는데 나무 냄새, 바람 기운 같은 산 느낌이 생긴다. 거기서 받은 영감을 추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필치는 예전 그대로인데 색이 달라졌다. 강한 터치는 옛날식인데 부드러운 컬러가 요즘식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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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를 바꾸고 색이 달라진 ‘숲과 바람길’(2017), ‘숲으로’(2020) 등을 시작으로 ‘기억의 숲’(2021) 연작, ‘숲에 있는 것들’(2021), ‘산풍경’(2021), ‘산의 기억’(2021), ‘관악산 1’(2021)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 틈에 간간이 섞인 ‘다른 것’도 보인다. ‘빛과 색’(2021) 연작이다. 말 그대로 총천연색을 찍어낸 듯한 ‘질서정연한 무질서’의 색을 잔칫상처럼 펼쳐낸 작품. “일종의 색놀이다. 산 그림도 답답하다 싶을 때 거기서 보고 왔던 색만 뽑아 놀이를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 말끝에 그이는 “사람의 본성은 안 바뀌는데 환경이 사람을 바꿔놓는구나 싶더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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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터가 먼저 알아본 ‘색놀이’… 앞다퉈 ‘빨간딱지’
전시를 개막한 지 두 주 남짓, 전시작 25점 중 20여점이 팔렸다고 갤러리 관계자가 귀띔한다. 호당가격은 15만원 정도. 신진작가와 다름없는 작품가에도 작가는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단다. “개인전을 다시 할 수 있는 것만도 고마워 작품이 팔린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뒤늦게 뛰어든 자신의 작업을 그이는 ‘배의 평형수 채우는 행위’에 비유했다. 억눌린 내적 자아를 토해내는 일이지만 결국은 세상과 화해를 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이젠 더이상 양보할 수 없는 내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인생을 낭비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미술시장이 좋든 나쁘든, 유명작가가 되든 못 되든, 이런 문제와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싶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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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 일’을 위해 그이는 매일 출퇴근하듯 ‘하루 10시간씩 규칙적인 작업’을 지켜나간단다. 벽돌공이 매일 공들여 하나씩 쌓아나가듯 말이다. 그림은 손을 움직여야지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오래전에 아프게 배웠던 터. “내 인생에 남은 10년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안다. 마음이 급해지기도 하지만, 작품을 할 때 생기는 고민과 갈등, 또 방황까지 작가라면 누구나 겪는 그것을 젊은 시절에 다 치러낸 셈치면 된다며 다독인다.”
과연 누군들 어떤 이의 32년은 ‘쉬웠다’고 말할 수 있겠나. 그래서 그 세월은, 이미 보낸 만큼이 아니라 이제 보낼 만큼에 따라 갈리게 되는 거다. 바로 마지막 벽돌 하나를 더 올리느냐 올리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왕 올릴 거 알록달록 색잔치면 더 좋겠고. 전시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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