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요즘 투자 좀 한다는 친구들이 다들 ‘미술품 투자’를 말해 안 와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미 다 휩쓸고 간 다음이라 예산에 맞출 작품들은 거의 팔렸고…. 그래도 왔으니 한 점이라도 사보려고 한다.” 초보컬렉터라고 자신을 소개한 30대 중반의 관람객(회사원)은 북적이는 인파에 적응하려 애쓰는 듯 보였다. 아직까지 특정작가에 대한 선호보다 눈길이 가는 ‘예쁜 그림’ 위주로 관심을 갖는 단계라고 했다(‘키아프 2021’에서 만난 한 관람객).
그림 한 점 사는 일이 ‘달리기 실력’에 달렸다는 건 새삼 알게 된 사실이다. 이쯤 되면 한 해 한두 번씩 외신을 타는 ‘블랙프라이데이’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기필코 사고야 말겠다는 소비자들이 상품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전경. 일단 ‘잡고야 본다’ ‘사는 게 남는 거다’란 목적의식도 비슷하다.
‘키아프(KIAF·한국국제아트페어) 2021’이 닷새간 일정을 끝냈다. 대기록도 세웠다. 2002년 출발해 20주년을 맞은 올해 최고점을 찍으며 650억원어치를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한 거다. 다녀간 관람객도 8만 8000명으로, 아트페어사상 최다다. 이로써 올해 초 바닥부터 끌어올린 미술시장의 분위기는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시작 전부터 기대감을 부풀린 ‘최대 매출’도 현실이 됐다. 과연 무엇이 이런 성황을 이루게 했을까. 역대급 흥행을 만든 요인 ‘셋’을 꼽아봤다.
|
◇①미술품 투자열기 최고조…“과열인 줄 알지만 기회기도”
올해 초부터 스멀스멀 삐져나오던 ‘반전’의 움직임이 가장 강하게 감지된 곳은 ‘미술품 경매시장’이었다. 지난해까지 바닥을 쳤던 낙찰총액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게 눈으로 보였다. 상대적으로 비싼 미술품이 사고팔리는 장이지만 굳이 경매시장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즉각적인 반응’에 있다. 오늘 저녁에 얼마나 팔렸는지를 내일 아침이면 알 수가 있는 거다. 컬렉터의 지갑이 어느 정도 열렸느냐에 따라 미술시장의 내일을 가늠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상반기에만 1483억원어치로 집계됐다. 지난해에는 상·하반기를 탈탈 털어도 1153억원에 그쳤던 터다. 이에 부응하듯 국내 양대 경매사는 격월로 열던 메이저경매를 매달로 당기고 매회 100억원 안팎의 낙찰총액을 쏟아내며 열기를 부추겼다.
여기에 또 하나의 신호가 나왔다. 아트페어다. 지난 3월 ‘화랑미술제’, 그 두 달 뒤 ‘아트부산’이 역대급 성과를 내며 선전했던 거다. 화랑미술제에선 4만 8000여명이 들러 예년의 두 배가 넘는 72억원어치를 사들이더니, 아트부산에선 한술 더 떴다. 8만명이 다녀가면서 아트페어사상 최고치인 350억원어치를 싹쓸이했던 거다.
덕분에 ‘키아프 2021’은 반드시 들러봐야 할 ‘성지’로 단숨에 부상했다. 미술품에 투자 중이거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면 더더욱. 아트페어의 낮은 문턱도 한몫했다. 원체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연합한 미술장터인 만큼 주요 타깃층은 슈퍼컬렉터보단 일반 대중을 향해 있다. “다들 한다니 나도 한 번쯤”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은 별로 없는 셈이다.
|
그럼에도 미술품 투자에 기대감을 끌어올린 주요 동기에 ‘몇만명’ ‘몇백억원’ 등의 ‘수치’가 작용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키아프 2021’에서 만난 한 관람객은 “모든 매체에서 ‘미술시장 투자열기’를 다루니 발을 들이지 않으면 나만 손해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며 “지나치게 몰린다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이 또한 기회가 아닐까 싶어 찾아왔다”고 털어놨다. “솔직히 가치가 있다는 작품보단 ‘돈 된다’는 작품을 더 찾게 된다”고 말하는 관람객도 있었다.
◇② 주식·코인·부동산 기웃거리던 MZ세대 “최적의 투자 대안 찾았다”
전통적인 컬렉터가 주도하던 미술시장에 도전장을 낸 이들은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투자에 적극적인 2030세대를 통칭하는 ‘MZ세대’다. 이번 ‘키아프 2021’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최 측이 30만원에 판매한 ‘VVIP 입장권’을 이들 MZ세대가 대거 구입하기도 했다. VVIP 입장권은 일반관람객보다 이틀 앞서 작품을 둘러보고 선점할 수 있게 ‘우선권’을 부여한 티켓. 비싼 입장권에 투자한 만큼 한 점이라도 더 찾아내려 부산히 움직였던 것도 물론이다.
다른 세대보다 MZ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셀럽의 움직임’도 한몫을 했다. 해마다 키아프는 놓치지 않는다고 소문 난 BTS의 RM을 비롯해 뷔가 다녀갔고, 아들과 동반한 이병헌·이민정 부부도 카메라에 잡혔다. 이외에도 유아인·전지현·성유리·청하·한지혜·고준희 등 스타 연예인들의 행차는 SNS를 통해 실시간 전송됐다.
|
MZ세대의 미술시장 진입은 ‘타이밍’이 컸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에 확장한 ‘온라인 거래’가 주효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책장 넘기는 것보다 쉽다는 ‘디지털기기’의 작동을 통해 온라인뷰잉룸을 둘러보고 온라인경매에 참여하고, 작가나 갤러리스트와 화상 대화를 나누는 등 ‘미술품 구매’에 대한 오프라인 부담감을 덜어냈다는 거다.
때마침 불기 시작한 투자붐도 주효했다. 주식과 코인은 물론 부동산시장까지 기웃거리던 이들이 ‘최적의 투자처’로 미술시장을 낙점했다는 얘기다. 제약과 부침이 심한 다른 투자처보다 세제혜택은 물론 자신의 취향까지 한껏 드러낼 수 있는 미술품 투자에 꽂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③ 갤러리들 “명절 앞둔 대목 격…팔릴 그림들 걸었다”
갤러리가 연합해 꾸린 ‘아트페어’의 목적은 분명하다. ‘작품을 최대한 많이 파는 것’이다. 갤러리 입장에서는 명절을 앞둔 ‘대목’인 셈이다. 가격 물어보기도 겁나는 작품보단 살까 말까 애태울 만한 작품들을 걸고 판다. 대작보단 소품, 어려운 작품보단 쉬운 작품이 전시장을 채운다. 한 갤러리 대표는 “어차피 팔리는 작가라면 진짜 좋은 작품은 빼놓고 나온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
작가에게 아트페어, 특히 키아프만을 위한 작품 제작을 독려하는 것도 갤러리다. 그 ‘작가’들은 그간 진행한 개인전·초대전·기획전 중 관람객에게 주목받은 이들이 대다수. 때문에 ‘팔리는 작가’의 작품을 잡기 위한 갤러리 간의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고 작가군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피해갈 수 없다. 결국 새로운 작가군을 알리기보단 “이미 검증된 팔릴 작가의 그림을 거는 것이 답”이란 얘기다. 역대급 매출을 쓴 ‘키아프 2021’에선 그 영업전략이 적중한 셈.
올해도 각 갤러리 대표작가들의 활약은 뚜렷했다. 가나아트가 건 노은님의 ‘동화 같은 회화’, 학고재갤러리가 건 김재용의 도자작품 ‘도넛’을 비롯해, 선화랑이 건 정영주·김정수, 아뜰리에아키의 정성준·윤상윤, 갤러리조은의 채지민 등이 완판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오세열·전광영·우국원 등 인기작가의 작품은 서너군데 갤러리가 나눠 걸고 완판행진에 동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