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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굴뚝이다. 대형공장에 삐죽이 솟아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두 층짜리 건물지붕 위로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 반듯하게 올린 형태니까. 화룡점정은 ‘목욕탕’ 문양. 욕조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젠 지도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그 사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내용을 제쳐 두고 책표지를 이렇게 세세히 뜯어보긴 처음이다. 실제 연기가 폴폴 나는 굴뚝사진 위편으로 대문짝 만한 제목까지. ‘증발’이란다. 증발이라. 사람이 ‘실종’되든 혹은 거금이 ‘행방불명’되든 둘 중 하나란 뜻이겠지? 게다가 책의 장정이 말이다. 작고 두툼하고 가벼운 것이 추리소설용이라면 딱 어울릴 법하지 않나.
말하려는 의도를 눈치챘으려나.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거다. 추리소설은 웬걸, 심오한 경제서더란 거고. 좀더 구체적으로 모바일경제란 테마 아래서 벌어지는 일, 그중 증발이더란 거다. 그렇다면 뭐가 사라졌다는 건데. 그것도 연기처럼 허무하게 ‘휘리릭!’
그 단서는 니컬러스 네그로폰테(76)가 던졌다. “음반·영화·신문 그리고 책마저, 조만간 결국 사라질 것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정작 놀라운 건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부지기수란 점이다.” 풀어보자면 이런 거다. 물질이 디지털미디어에 밀리는 건 너무나 분명한데, 아직도 이런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보고 있지만 보지는 않는다”는 거다.
네그로폰테. 그가 맞다. 미국 MIT미디어랩 창립자. 25년 전 디지털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디지털이다’(Being Degital)란 저서로 세상을 화들짝 놀라게 했던. 미래사회가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시대에서 정보의 최소단위인 비트시대로 갈 거란 대담한 시나리오가 그의 머리와 손에서 나오지 않았나. “아톰이 아니라 비트를 움직여라”고 선언했더랬다.
그런데 그가 굳이 이 굴뚝연기 아래 새삼 등장한 이유는? 네그로폰테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평가받는 디지털미디어 분야 전문가인 저자가 감히 ‘비트’를 건드려서다. 비트를 움직이면 새로운 것이 툭 떨어지더란 그 시절의 차원을 뛰어넘은 게 아닌가. 비트를 움직이니 멀쩡하던 것이 휙 사라지더란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을 그려놨으니.
책은 디지털에 밀려 자취를 감춘 모든 것을 추적한 결과물이다. 이른바 ‘증발경제’라 명명한 그 현상의 핵심원리를 간파하는 동시에 그 증발경제가 몰고 올 변화에 대한 경고. 저자가 짚은 증발의 범위는 소소한 ‘물질’의 수준을 넘어선다. 예컨대 택시. 아마도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증발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저자는 ‘택시증발사건’을 ‘우버’란 형태에 빗대 심층 취재한다. “그 많던 택시가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릴 수도 있다는 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고.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이런 식이다. ‘트럭계의 우버’ ‘개 산책 부문의 우버’ ‘세차 부문의 우버’ ‘메시징 부문의 우버’ ‘식료품 배달 부문의 우버’ ‘주류 부문의 우버’ ‘긴급출동 서비스 부문의 우버’ 등등. 분야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소유를 증발시키는 경쟁에 임하고 있다는 것, 자신의 목표를 공중의 이익으로 포장한다는 것, 모바일앱과 소셜미디어로 팬을 규합하고, 앱 기반 포퓰리즘으로 시 정부를 압박한다는 것.
사실 이 정도는 약한 축에 든다. 도시외곽이 사라지고, 병원 가는 일이 없어지며, 노동이 종말하고, 일자리가 녹아내리고, 국가가 없어진다는데. 산업의 기반이라 할 ‘대기업’도 증발 리스트에 속해 있다. 그들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논지인데. 투자의 기본형태 말이다. 5000억달러의 매출을 위해 500억달러를 기꺼이 잃어주는, 그 본질이 실종될 거란 얘기다. 왜? 의미가 없으니까.
시대별 첨단기술이 어떻게 기존시스템을 무너뜨렸는가. 여기까지는 지극히 일반적인 분석법. 저자의 접근이 독특한 건 이들이 만들어낸 새 세상보다 공중에 날려버린 헌 세상을 들여다봤다는 거다. 초창기 퍼스널컴퓨터 때 도입한 데스크톱 출판부터 암호화폐의 화두를 던진 블록체인에 이르기까지. ‘증발’이란 파격적 개념을 끌어들여서 말이다. “비트는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으니 계속 움직인다”는 묘사까지 꺼내놓고. 게다가 디지털화가 멈추지 않는 이상 증발은 계속될 거란 압박도 잊지 않았다. “허공 위에 세운 정보제국을 지키려면 바람을 계속 불어넣어야 한다”는 거다. 바람이 빠지면 실체가 없어지고 우린 이를 ‘붕괴’라고 말하니까. 결국 비트 하나 옮겨놨더니 시스템이 무너졌다가 다시 생기고, 패러다임이 뒤집힌다는 뜻인데.
△정보제국 지키려면 바람 계속 불어넣어야
증발경제에서 벌어지는 승자독식은 저자가 적잖이 신경을 쓴 부분이다. 공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이 디지털세계라면 말이다. ‘기업 한 곳이 수억명에 이르는 이용자의 절대적 선호대상이 될 것’이니. 교과서 같은 그 사례로 페이스북을 소환했다. 특히 CEO 마크 저커버그가 2012년 ‘모바일 퍼스트’를 선언한 이후의 변화에 주목했다. 스마트폰 유저는 이용시간 중 80%를 앱에서 보내고, 그중 20% 이상을 페이스북에서 보내는 상황. 결과는 바로 매출이 됐다. 채 1년이 지나기 전 모바일 광고매출이 전체 중 절반에 육박했고, 2017년 4분기에는 89%에까지 도달하는. 앱 독재자가 곧 세상의 승자가 되는 증발시대를 이보다 잘 드러낼 그림이 없다는 거다.
증발을 피해 살아남을 방법은 없겠나. 소프트웨어나 모바일이 해치우는 먹이사슬에서의 생존전략 말이다. 답이 없진 않다. 다만 똑 떨어지는 어떤 것을 기대했다면 마음을 고쳐먹는 게 좋겠다. 무엇보다 더 이상 고체처럼 안정된 상태에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란 점을 명심하란다. 증발이 좋든 싫든 상관없단 소리다. “증발경제에서 사업을 하려면 애플·구글·아마존 등 인터넷 거인을 공부해야 한다”고. 전통산업이라면 배 이상의 노력이 더 필요할 거고, 눈을 부릅뜨고 기술과 시장의 흐름을 살펴야 한다고. 바람이 빠지는지, 연기처럼 날아가는 중인지 점검하고 또 점검하고.
액체가 기체로 바뀌어 사라지는 가장 보편적인 자연법칙. 그 핵심개념을 데려다 놨지만 저자는 증발이 그저 흔한 라이프사이클이 아니란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말이다. 어느 순간 훅 날아가지 않으려면, “증발한 대기업에 입사한 걸 환영합니다”란 소릴 듣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