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침몰하던 ‘EU호’를 풍랑 속에서 진두지휘하며 기사회생시킨 독일에 대해 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유럽의 ‘금고지기’ 역할을 하며 EU를 구제한 ‘해결사’ 독일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전문가들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독일 제조업을 첫손에 꼽는다. 유럽 전체 제조업이 창출하는 부가가치의 30%를 독일 혼자서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세계 시장 수출 점유율은 7.4%로 중국(11.5%), 미국(8.7%)에 이어 3위다.
지난 2012년 기준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한 품목 수는 중국(1485개)에 이어 2위(703개)를 차지하며 미국(603개), 일본(231개)을 뛰어넘었다. 독일 제조업의 뿌리도 세계 어느나라보다 깊고 탄탄하다. 200년 이상 존속한 장수기업만 1563개에 달한다. 반면 우리는 이런 장수기업을 아직까지 단 1개 업체도 갖고 있지 않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4일 독일 제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비결을 5가지로 정리해 발표했다.
◇ 경기와 무관하게 연구·개발(R&D) 투자 지속
전 세계에서 R&D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기업은 어디일까. 정답은 삼성전자(2위), MS(3위) 등 글로벌 IT기업도, 노바티스(7위)와 같은 다국적 제약회사도 아닌 독일 폭스바겐이다. 폭스바겐은 지난 1980년부터 시장상황과 관계없이 매년 매출의 5%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5%룰’을 철저히 지켜왔다.
이미 지난 1980년대에 중국에 투자 및 현지전략모델을 개발, 중국시장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폭스바겐외에도 R&D 투자순위(2012년)로 본 글로벌 500대 기업 리스트에는 독일기업 41개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독일기업들은 기술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에 비해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한국기업은 13개에 불과했다. 매출액 대비 R&D 비중 또한 독일(6.5%)이 한국(3.1%)의 2배를 넘어선다.
독일의 R&D 경쟁력은 국가 전역에 구축된 300여개의 산업클러스터가 밑바탕이 되고 있다. 정부가 클러스터 설립의 밑그림을 그리면 기업들은 강력한 산학연 네트워크를 통해 자생적인 선순환 구조를 정립해 왔다.
◇ 안정적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한 높은 노동생산성
안정적 노사관계는 독일의 높은 노동생산성의 비결로 손꼽힌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2013 세계경쟁력 보고서를 통해 독일의 노동생산성을 세계 1위, 노사관계 생산성을 8위로 평가했다. 반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8위, 노사관계 생산성은 56위를 기록했다.
독일에서는 기업이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근로자는 근로시간과 임금인상을 양보하는 방식의 돈독한 노사 관계 문화가 정착돼 있다. 대표적 예로 다임러벤츠는 지난 2009년 글로벌금융위기 속에서도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 대신 20억 유로의 노동비용을 절감하는 노사협약을 체결했다. 모든 근로자는 노동시간을 8.75% 감소시켰으며, 각종 성과급 및 임금인상 계획을 유보했다. 독일 정부가 재계와의 공동작업으로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 등을 포함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단행한 것도 실업률 증가 없이 금융위기를 넘기는 데에 일조했다.
◇ 기업경쟁력의 원천이 되고있는 기술인재 양성
‘기술은 마르지 않는 금광과도 같다’라는 독일속담이 있다. 독일에서 기술은 전통과 장인정신의 산물로 역사적, 국가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독일에서는 60%의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와 현장이 결합된 형태의 직업교육(Dual System)을 통해 전문기술을 습득한다.
독일의 명품차로 잘 알려져 있는 BMW도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매년 800여명의 인턴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들은 자동차 개발, 제작, 정비 등 12가지 전문 직무에 따라 기술을 전수 받고, 졸업 후에 동 분야에 바로 취업하게 된다. 이 외에 폭스바겐, 다임러 등 50만개 이상의 대·중소기업들도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산업 수요와 일치하는 교육을 제공하는 독일의 시스템은 개인·기업·사회에 긍정적인 선순환을 가져오고 있다. 숙련된 기술인력을 기업에 공급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청년 실업률을 낮춰 국가경쟁력을 높인다.
기업의 평균 수명은 20년을 넘기 힘들고, 30년이 지나면 80%의 기업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100년, 200년을 넘어서 생존하고 있는 장수기업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독일에서는 1500개가 넘는 200년 이상의 장수 기업이 존재한다. 이 중 상당수는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 점유율 1~3위를 기록하며 독일 제조업을 이끌고 있는 강소기업들이다.
장수기업 성공의 이면에는 가족경영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은 전체기업의 95%가 가족기업 형태로 안정적인 기업경영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책임경영과 더불어 근로자 및 지역사회와 높은 유대감을 유지해 생존확률을 높인다. 300년 역사의 머크사 또한 1668년 작은 약국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글로벌 화학원료 및 제약기업으로 성장했다. 13대째 가족구성원들이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어 긴 안목으로 투자전략을 수립해 왔다.
◇ 강점분야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시장 창조
독일은 각 제품군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들이 유달리 많다. 특정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우량기업이 미국, 일본 등에 비해 4~5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160년의 역사를 가진 지멘스는 전통적인 전자기기 공학 기업이다. 전자부분 기술역량에 집중하여 최초의 진공청소기, 인공심장박동기 등 가전제품과 의료기기를 넘나들며 획기적인 전자기기를 개발해 왔다. 기술선도로 시장 자체를 창조하여 진출하지 않은 전자제품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다.
유지미 전경련 국제협력팀장은 “미국 제조업이 살아나고 중국의 추격이 턱 밑까지 온 가운데 지난해 주요 수출 기업의 영업이익률이 하락하는 등 국내 제조업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늦기 전에 지속적인 R&D투자와 기술인력 양성 등 독일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여 제조업의 경쟁력을 업그레이드 해야 할 것” 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