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21일 별세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은 한국 현대사를 이끈 재계의 거목으로 평가되고 있다. 재계원로들이 평소 가졌던 그에 대한 평가를 들어본다.
◇송인상 전 한국능률협회장= <아이디어 샘솟는 불세출의 기업가>
아산에 대해 나는 여러 가지 입장에서 겪어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양한 시각에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긴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와 함께 지냈던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고 그의 성격과 일하는 스타일, 생각하는 방식 등을 그저 내 나름의 느낌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아산과 나는 1920년대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강원도 통천에서 보냈다. 그는 송전보통학교에 다녔고, 나는 통천보통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서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같은 시대를 한 지역에서 보낸 셈이다. 통천군 송전은 청송백사(靑松白沙)로 유명한 송전해수욕장이 있고 경치가 수려한 고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자연조건이 소년 시절 아산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사람을 매혹하는 아산의 자질은 아마도 이런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방의 감격과 전쟁의 참회를 거쳐 전재복구에 여념이 없던 1950년대 종반, 미국 원조가 DLF 차관으로 바뀌어져 갈 무렵 부흥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나는 아산과 만나 시멘트 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기업가로서의 아산의 편모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의 재임 중에 현대시멘트 건설은 실현을 못보았지만 그의 치밀한 기업가적 재능은 엿볼 수 있었다.
1960년대 중반에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세계 각국을 돌며 한국에 투자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정부의 4대 기획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분야의 투자 유치를 위하여 스웨덴의 요테보리(Gothenburg) 조선소와 노르웨이의 아카(Aker)그룹을 방문해서 관계인사들과 폭넓은 교섭을 하였는데, 그것이 현대가 조선사업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교섭의 결과로 아카그룹의 시엠(Siem) 사장 일행이 한국에 왔고, 아산은 현대그룹이 정부로부터 조선사업자로 지정된 것을 전후하여 영국의 애플도어(Appledore)와 조선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때에도 아산의 과감성과 사업적 수완은 여실히 표출되었다. 영국에서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자재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산은 희랍의 선주로부터 이미 수주를 따냄으로써 세계의 조선업계 인사들을 놀라게 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현대중공업이 조선사업을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아산은 리더십이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사업을 펼쳐가면서 그가 보여준, 미지의 세계에 돌입하는 모험심과 불퇴전의 용기는 뭇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고 지금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조선소 건설 현장을 야간에 손수 돌아보다가 자동차를 탄 채 물에 빠졌던 이야기는 그의 불굴의 용맹과 모험심을 여실히 알려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나는 아산과 함께 6년 동안 전경련을 맡아 일한 적이 있다. 내가 전경련 부회장이 되었을 때 아산은 이미 회장으로서 4년 여를 일해오던 터였다. 원용석, 정인욱 그리고 내가 부회장으로서 아산을 모시고 전경련의 일들을 열심히 돌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아산의 기업가로서의 모습은 크게 드러났다.
그는 나 같은 행정가 출신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를 때때로 내놓곤 했다. 그런 제안들에는 거시적으로 크게 멀리 내다보는 혜안과 탁견이 담겨 있었고, 그러면서도 비용과 효율을 충분히 고려하는 기업가의 본질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침에 모여 회의를 하다보면 아산은 곧잘 깜짝 놀랄만한 아이디어를 돌연하게 이야기했다. 한강의 고수부지도 그가 제안한 것이다. 오늘날 서울 시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고 있는 이 고수부지의 아이디어를 아산이 담담하게 꺼냈을 때, 그런 일에 전혀 조예가 없던 나로서는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렸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옳았으며 지금의 고수부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언젠가 아산이 나에게 “송 회장도 무슨 사업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 같은 관료 출신은 사업을 하기에 가장 부적절하고, 나는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전혀 없다.”고 답한 적이 있다. 그러자 아산은 “나는 길을 가다가도 이곳 저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발견하는데, 송 회장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아산에게는 무슨 아이디어든지 사업으로 전환해서 이익 창출의 기회를 마련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다.
아산이 전경련 회장으로 있을 때는 한국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큰 발전을 향해 줄달음치던 시대였다. 아산은 비단 대내적인 경제발전 뿐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전경련의 국제협력사업에 대하여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동남아 여러 국가와 경제적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아세안 협력사무소(Korea-ASEAN Business Club)를 만들었고, 몸소 대표단을 이끌고 필리핀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심방하기도 했으며, 구주를 위시한 각국과의 경제협력위원회 설립에도 엄청난 집념을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이 오늘날 한국이 국제적으로 잘 알려지고 경제적 측면에서 훌륭한 파트너로서 여러 나라들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아산은 도전을 기회로 만드는 탁월한 재질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려운 일에 당면해서 우리가 용기를 잃고 있을 때 그는 이런 때야말로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격려했다.
한국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잃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로서 아산은 지나치게 높은 금리를 들었다. 그는 경제기획원 장관실과 한국은행 총재실을 찾아가 대만 등 우리와 비슷한 개발도상국의 금리를 비교하면서 금리를 비교하면서 금리 인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정부의 규제를 철폐, 완화해 줄 것을 집요하게 건의했고, 전경련 내에 규제 완화를 연구하고 건의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 운영하기도 했다. 아산은 정부가 그러한 몇 가지 일만 도와준다면 다른 경제적 사안에 대해서는 기업가인 우리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것을 역설했는데, 그런 과정에서의 아산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철인 같은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아산은 어느 모로 보나 웅변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기업가로서의 철학에서 우러나온 진지함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무게가 실렸다. 아산과 함께 일본에 가서 한일경제협력회의에 참석했던 때의 일이다. 일본측 위원들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산이 말하는 것에 더 큰 무게를 두고 경청했다. 그것은 아산의 확고 부동한 기업가적 신념과 그 소박한 접근 방식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기업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산이 성취한 현대의 성장사가 큰 무게로써 그들을 압도한 것이라고 믿어지는 대목이다.
아산과 나는 강원도의 낙후된 지역 출신으로서 한국경제가 도약단계로 뛰어들 무렵 경제계에서 같이 생각하고 희비애락을 함께 나누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 필시 우리 두 사람이 전생에 대단히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불세출의 기업가 아산과의 만남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정녕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
*자료 = 현대그룹 사이버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