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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들은 해당 지역에서 이뤄지는 외국 원양어선의 불법 어로와 오물 투기를 막기 위한 해안경비대를 자처했지만 실상은 선원들의 몸값을 목적으로 선박 납치를 일삼았다. 새우잡이 원양어선인 마부노호는 어로 작업을 하지 않고 단순히 해당 해역을 통과하던 중이었는데도 피랍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마부노호는 납치된 지 보름쯤 지난 그해 5월 말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400km 떨어진 하라데레에 억류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후 마부노호 선주 안현수 씨가 해적들과 협상을 통해 선원 석방금을 대략적으로 합의했음에도 정부는 “테러범과는 협상 없다”는 원칙만 고수한 채 해적들이 요구한 몸값을 지원하는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부노호 피랍 불과 1년 전인 2006년 4월에도 동원수산 소속 동원호가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피랍됐다. 당시에도 선원들의 몸값을 놓고 해적과 줄다리기를 하다 피랍 상태는 장기화됐고 결국 동원호 선원들은 117일 간이나 억류돼 있어야 했다. 그런데 1년 만에 되풀이된 피랍 상황에서도 외교부가 몸값 지원 등 측면 지원에 사실상 손을 놓자 사실상 마부노호 선주 안현수 씨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소말리아 현지 인맥을 통해 다각적인 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덴마크 선박의 선원들이 높은 금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면서 마부노호 선원들의 몸값 협상은 더욱 어려워지기만 했다. 한때 해적들은 선원 24명의 몸값으로 500만 달러까지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랍 후 약 3달이 지나자 해적들은 선원들을 쇠파이프 등으로 구타하기 시작했고, 선원들 중 일부는 고막이 터지거나 폭행으로 쇠약해져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선원들은 해적들에게 “차라리 죽여 달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적들은 선원들의 가족들에게 직접 연락해 압박의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외교부만 믿고 석방 소식만 애타게 기다리던 선원 가족들은 협상 진행이 지지부진하자 그해 9월 20일 상경해 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연맹 관계자들과 함께 외교부를 항의 방문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선원 가족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 차원의 모금 운동과 기독교계의 지원이 이어졌다.
이에 정부도 뒤늦게 사태 해결에 나섰다. 결국 같은 해 11월 4일 석방된 선원들은 우리 정부의 요청에 따른 미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그달 13일 예멘의 아덴항으로 입항했다. 피랍 174일 만의 일로, 이 174일은 한국인이 외국에서 납치된 사건 중에서 최장 기간이었다. 다행히 선원 전원은 무사했다.
해외 교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외교부는 국가정보원이나 해양수산부와 달리 이 사건에서 아예 발을 빼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 선원들이 풀려나자 그제서야 “마부노호 선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는 발언을 내놓으며 선원 가족들의 원성을 들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