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플방지]박원순 "얘기를 하지!"...또 다시 등장한 '새벽 마라톤'

박지혜 기자I 2020.07.19 00:05:00

故 박원순 성추행 피해자 추가 폭로
역할과 외모 강요 받는 ''여비서''
''시장님''은 못 듣는 을의 ''얘기''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아니, 얘기를 하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지난해 KBS 2TV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비서관이 다리 통증을 숨기고 자신과 새벽 마라톤에 함께 했다는 사실을 안 뒤 한 말이다. 명확한 갑을 관계에서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을이라면 누구나 안다.

당시 박 시장은 일주일에 2번, 새벽 6시부터 1시간가량 마라톤을 즐겼다. 그의 옆에는 늘 비서관이 따랐다. 이에 다른 출연진이 ‘갑질’이라고 지적하자 박 시장은 “같이 운동하는 거니까”, “한 번도 싫다는 얘기를 안 해서”라고 말했다.

‘새벽 마라톤’ 중인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비서관 (사진=KBS 2TV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방송 캡처)
이후 비서관은 아내와의 통화에서 “오늘은 조금밖에 안 뛰어서 발목이 조금 덜 아팠다”고 말했다. 다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통증이 있었음에도 계속 참고 뛰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서관이 과거에 무릎 수술을 두 차례나 받은 사실이 공개됐고, 박 시장은 연신 “미안해 죽겠네”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박 시장의 ‘선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침 운동으로 지친 비서관이 원한 든든한 점심 메뉴와 달리 자신의 일정에 맞춘 사찰음식을 제안하는가 하면, 흔치 않은 ‘칼퇴’로 마련된 비서관의 오붓한 가족 식사 자리까지 함께했다.

‘소통하는 시장님’에서 ‘꼰대’가 되어버린 박 시장은 방송 이후 유튜브 채널을 통해 “사실 저도 그 프로그램 찍으면서 굉장히 반성을 많이 했다”며 “나름대로 열심히 직원들한테 잘해준다고 했는데 그게 제대로 된 게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 “박 시장 마라톤에 여비서 오면 기록 잘 나와”

박 시장의 새벽 마라톤은 그가 돌연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 그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전 비서 A씨의 폭로에서 다시 등장했다.

A씨를 지원하는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16일 보도자료를 통해 ‘서울시장 비서실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성희롱과 성차별적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자료에 따르면 박 시장은 마라톤을 하는데 여성 비서가 나오면 기록이 더 잘 나온다면서 주말 새벽에 나오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또 “결재를 받을 때도 시장의 기분 상황을 확인하고, 심기보좌 혹은 ‘기쁨조’와 같은 역할을 요구 받았다”고 했다. 시장의 낮잠을 깨우는 것도 여성 비서의 몫이었고, 샤워할 때 옷장에 있는 속옷을 샤워실 근처에 가져다줘야 했으며, 시장실을 방문한 국회의원 등이 “비서를 얼굴로 뽑는다”고 말하는 등 성희롱적이 발언도 있었다는 게 상담소 측의 주장이다.

사진=KBS 2TV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방송 캡처
박 전 시장의 생전 말처럼 A씨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A씨측에 따르면 A씨는 2016년 1월부터 인사이동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특히 2019년 7월 근무지를 옮겼는데 이후 다시 비서업무 요청을 받자 인사담당자에게 ‘성적 스캔들’을 암시하며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당시 담당자는 문제상황을 파악조차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A씨가 전보인사 기준을 언급하면서 부서를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 시장은 “그런 걸 누가 만들었느냐, 비서실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며 피해자의 전보 요청을 만류하고 승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위력 앞 무력…‘여비서’에 대한 강요까지

A씨를 ‘피해자’로서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크지만 “4년 동안 뭐하다 이제 와서…”, “당연히 비서가 할 일 아닌가”, “앞으로 여자를 비서로 쓰지 마라”라는 등의 조롱섞인 의견도 나오는 게 현재 상황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상 속에서 수많은 위력을 경험하고, 또 무력을 느낀다. 그만큼 ‘위력 인지 감수성’은 민감하지만 모순적으로 “나는 그보다 더한 일도 당했다”, “그런 일은 주변에 비일비재하다”고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여기에 여비서에게만 따라다니는 역할과 외모에 대한 강요가 아직 만연한 까닭도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인 수행비서 김지은 씨가 안 전 지사의 출장 시 호텔을 직접 예약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그러자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비서 특히 수행비서는 숙박업소 예약도 업무 중 하나다. 상사는 그 어느 것도 직접 예약하지 않으며 문의하지 않는다. 이전 비서도, 이후 비서도 하는 업무이며, 현재 많은 정치인의 비서가, 기업의 비서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정에는 운전기사가 이동을 지원한다”고 반박했다.

이어 “직장 내 피감독자 간음 추행 사건, 특히 비서 업무를 수행했던 자에 대한 간음 추행 사건에서 업무 수행 과정을 마치 ‘합의한 성관계’ ‘비밀스런 관계’ ‘자발적인 관계’의 뉘앙스로 기사를 쓴 보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면서 “왜 일정과 다르게 굳이 숙박 예약을 지시했는지, 공금 출장으로 처리할 수 있었는지, 못했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숙박지에서 다른 비서들에게 하지 않았던 위력 행사를 한 바가 있는지 ‘질문’이 향할 곳은 가해자”라고 지적했다.

◇ ‘시장님’은 못 듣는 을의 ‘얘기’…“좋은 모델”

홍준표 무소속 의원의 ‘채홍사(採紅使)’ 발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홍 의원은 지난 13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언급하며 “피해자가 한 명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무성하고 심지어 채홍사 역할을 한 사람도 있었다는 말이 떠돌고 있다”고 했다. 채홍사란 조선 연산군 때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한 관리를 말한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텔레그램 비밀대화방 초대화면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무리한 발언이었지만 일각에선 A씨 측의 기자회견서 나온 면접 과정을 지적했다.

A씨 측 법률대리인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는 13일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는 공무원으로 임용돼 서울시청이 아닌 다른 기관에서 근무하던 중 서울시청의 연락을 받고 면접을 봐 4년여간 비서로 근무했다”며 “피해자는 시장 비서직으로 지원한 적 없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논란이 일자 서울시 당시 인사과장은 한 매체를 통해 “누군지 기억나지 않지만, 서울시 인사시스템은 비서실 근무라고 하더라도 본인의 의향을 묻고 결정한다”고 반박했다.

이에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예쁘면 뽑아 가더라”, “암묵적인 관행”, “나도 기초자치단체 공무원인데, 나조차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구청, 군청에선 예삿일이다. 이번 기회에 공론화됐으면 좋겠다”, “비서 선정 기준에 대해 정보 공개가 됐으면 한다” 등의 댓글이 잇따랐다.

서울시는 직원들 사이에서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자 지난 5월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재발방지 종합대책’을 추가로 내놨다. 그러나 이번 일로 그 종합대책도 ‘시장님’ 앞에선 소용없는 대책이라는 게 확인된 셈이다.

박 전 시장이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했던 “내가 오늘 깨지긴 했지만 제가 좋은 모델이 되어드렸네요”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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