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년간 금융권 여성들은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이들의 직장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시대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때로는 현실에 순응하면서 또 저항해야 했다.
필자는 1970년대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늘 어머니로부터 “여자는 ‘남편 복’과 ‘자식 복’이 전부”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미혼 여성만 직장에 다일 수 있다는 당시 금융권의 ‘결혼퇴직각서’ 제도는 매우 불만스러웠다. 국책은행마저도 여성은 결혼과 관계없이 30세가 되면 그만둬야 했다. 그래서 필자는 결혼해서도 다닐 수 있는 외국계 금융사를 택해야만 했다.
금융권에는 이런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여성들이 있었다. 몇몇 여성이 중심이 돼 국내 은행의 ‘여(女)행원’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킨 것이다. 결국 1976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를 계기로 결혼퇴직각서 제도는 폐지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취업 시장에서 남성은 일반직 행원으로 채용됐지만 여성은 여행원으로 분리 채용됐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승진과 임금에서 차별은 당연시됐던 것이다. 이런 관행은 1992년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면서 제도적으로는 폐지됐다. 국내 은행 중에서는 제일은행이 나서서 여행원 제도를 조건없이 처음 폐지했고 다른 은행들도 이를 서서히 따라갔다. 비로소 여행원은 근속 10년이면 소정의 시험을 치른 후 ‘초급 행원’으로 신분 전환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정부는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사업주가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을 동일하게 적용하더라도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남성 또는 여성이 다른 한 성에 비해 현저히 적고 또 그로 인해 특정 성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경우 ‘차별’로 본다”고 규정했다. 이에 금융권은 비정규직의 고용은 보장하되 임금 차별은 유지할 수 있는 ‘직군제’를 도입했다. 다만 이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해도 임금·승진의 차별로 잘해야 ‘만년 과장’으로 퇴임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현재 이 직군에 있는 90% 이상이 여성이다. 금융권의 큰 임금 격차는 직군제가 그 원인인 셈이다.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여성금융인 국제컨퍼런스’ 기조연설에서 세계 최대의 연기금(약 1800조원 규모)인 일본 공적연금(GPIF)의 히로 미즈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여성의 경영 참여 확대(W-ESG) 관련 지표를 연기금 투자에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한다. ESG 투자는 통상 사회적책임 투자로 여겨진다. GPIF의 ESG 투자 결과 2003년 3.7%였던 여성 임원 비율은 2017년 7%대까지 상승했다. 2% 초반대인 한국을 크게 웃돈다. 미즈노 CIO는 “W-ESG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영국 재무성은 ‘여성금융인 헌장’을 제정한 이후 영국에 주재한 금융사들로부터 서명을 받고 있다. 이는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12%를 차지하는 금융산업(종사자 약 200만명)에서 남녀간 임금 격차가 크고 상위 직급에 여성이 희소하다는 것은 사회와 조직에 큰 비용을 발생시킨다는 게 골자다. 블룸버그는 전세계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성평등 지수(GEI)’를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전세계 36개국 230개 기업들이 지수에 편입돼 있다. ESG 투자가 전세계 자본시장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내는 아직 이런 인식이 부족한 편이다. 국내 금융사 중 블룸버그 GEI 지수에 편입된 곳운 KB금융지주와 신한금융지주 정도다. 여성친화적인 기업을 선별해 투자하는 펀드는 메리츠자산운용(더우먼펀드)이 유일하다.
그런 와중에 최근 정부가 발표한 공공기관이 여성 고위직 비율 확대 계획을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한 것은 고무적이다. 앞으로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은 관련 보고서를 해마다 작성해야 한다. 양성 평등 현황, 전년도 이행 실적과 향후 5년 이행 계획 등이다. 적어도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글로벌 기업들의 ESG 흐름을 따라가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