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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원만 깎아줘”…국선변호사 앞에 쌓여간 빨간 자루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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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나연 기자I 2026.08.27 00: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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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차 국선전담변호사 박유영 인터뷰
월 평균 28건 배당·동시에 100건 이상 담당
수사단계 공백부터 피해자 국선 고충까지

[이데일리 채나연 기자] “도대체 벌금 얼마면 만족하시겠어요?”

재판이 끝난 뒤 폐기를 앞둔 사건 기록들.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재판이 끝난 뒤 폐기를 앞둔 사건 기록들.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박유영 국선전담변호사가 한 피고인에게 전화로 물었다.

“100만 원 정도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급 호텔 휘트니스 회원권을 가진 이 피고인은 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아 재판에 넘겨졌다. 벌금 300만 원이 200만 원으로 낮아졌지만 다시 항소했다.

박 변호사에게 이런 모습이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다. 청담동에 건물을 여러 채 가진 한 피고인은 사위가 법조계에 있다며 “‘이걸 제출해라, 저걸 해라’ 하는 식으로 여러 요구를 하기도 했다”고 박 변호사는 전했다.

이들이 국선변호인을 선정받은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현행법상 구속됐거나 미성년자인 경우 등 일정한 사유에 해당하면 경제력과 관계없이 법원이 국선변호인을 선정한다.

박 변호사에게 남은 질문은 한정된 국선의 시간과 인력을 누구에게 얼마나 쓸 것인가였다.

AI가 생성한 이미지. (사진=챗gpt)
AI가 생성한 이미지. (사진=챗gpt)
그 질문은 정반대의 피고인을 만났을 때 더 선명해졌다.

지적장애가 있는 50대 여성은 길에서 주운 카드를 쓰거나 무인점포에서 물건을 가져가는 일을 반복해 50여 차례 형사처벌을 받았다.

“장애인 등록이 안 돼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가족조차 등록 절차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박 변호사는 장애등록에 필요한 절차를 알아보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는 일에 나섰다.

한쪽에는 벌금 100만 원을 더 낮추기 위해 항소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50여 차례 처벌을 받는 동안 필요한 도움과 연결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박 변호사에게 배당될 때는 둘 다 똑같은 ‘한 건’이었다.

“지금은 사선처럼 해줄 수 없어요”

매일 쌓이는 수많은 사건 기록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매일 쌓이는 수많은 사건 기록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서울서부지법에서 13년째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는 박 변호사에게 한 달 새 배당되는 사건은 평균 28건이다. 재판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사건이 들어오고 그 사건이 끝나기 전에 또 다음 사건이 쌓인다.

“가지고 있는 건수는 100건 이상 넘죠”

대법원의 올해 모집 공고상 일반 법원의 국선전담변호사 선정 건수도 월 20~35건이다.

지난해 1월 박 변호사는 다시 신규 국선전담변호인 선발 면접장에 앉았다. 2년씩 두 차례 재위촉한 뒤에도 계속 일하려면 6년마다 다시 신규 선발 절차를 거쳐야 한다.

6년 전 면접에서 “사선변호사처럼 열심히 해주겠다”고 했던 박 변호사는 이번에는 다른 말을 했다.

“지금은 사선변호사처럼 해줄 수 없어요. 현실적으로 건수나 여건이 그렇지가 않아요”

사건마다 필요한 시간과 노력도 다르다. 기록이 얇고 비교적 단순한 사건이 있는가 하면 기록 자체가 캐비닛을 채울 정도로 방대한 사건도 있지만 배당될 때는 모두 한 건이다.

여러 재판부에서 사건을 받다 보니 각 재판부는 박 변호사가 다른 곳에서 어떤 사건을 얼마나 맡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다른 재판부에서 뭘 어떻게 받고 있는지 서로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너한테 줄 수 있는 건수만큼 다 줄 거야’ 하는 식으로 꽉 채워버리는 거예요”

박 변호사는 사건 수뿐 아니라 기록의 양과 난도, 피고인의 특성까지 고려해 업무량을 조정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라진 CCTV…국선을 만났을 땐 이미 늦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법정 앞 모습.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법정 앞 모습.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문제는 사건이 자신의 책상에 올라오기 전부터 시작되기도 했다.

한 남성이 길에서 여성의 신체를 만지고 달아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에서는 범행 시각이 중요했다. 경찰이 확보한 것은 CCTV 원본이 아니라 모니터 화면을 휴대전화로 촬영한 파일이었다.

“날짜와 시각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어요”

수사기록에는 현장 주변 추가 CCTV를 찾기 어렵다는 취지로 적혀 있었다. 결국 박 변호사는 피고인에게 현장에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범행 현장 인근에 CCTV가 많았어요. 그런데 기록에는 없다고 돼 있었죠”

하지만 이미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 CCTV에 무엇이 찍혀 있었는지는 이제 알 수 없다. 피고인의 혐의를 뒷받침했을 수도, 반대로 혐의를 벗겨줄 증거였을 수도 있다. 영상이 사라지면서 확인할 기회도 사라졌다.

“피해자 국선도 만만치 않아요”

박유영 국선전담변호사가 '정신적 장애와 사법'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모습.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박유영 국선전담변호사가 '정신적 장애와 사법'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모습.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박 변호사가 바라본 국선의 어려움은 피고인을 변호하는 자신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 국선 변호사님들도 많은 사건을 계속 안고 가야 돼요. 수사 단계에서부터 확정될 때까지 계속 그거를 안고 가니까 거기도 업무가 만만치 않고요”

피고인에게는 잘못을 지적하며 “반성하라”고 말할 수 있지만 피해자를 대리할 때는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로해주고 공감해줘야 하고요. 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죠”

오는 10월 개정 형사소송법 시행을 앞두고 수사 초기 법률조력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국선변호인의 역할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인력과 예산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선변호사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법원 예산 부족으로 지급하지 못한 피의자 측 국선변호인 보수는 누적 300억원에 육박한다. 피해자 국선 역시 인력과 선정 지연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3000건, 1만명…“그 아픔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목격자”

(사진=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법정 앞 모습.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사진=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법정 앞 모습. (사진=박유영 변호사 제공)
13년 동안 박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약 3000건에 달한다.

하지만 그에게 3000건은 피고인 3000명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피고인의 맞은편에는 피해자가 있었고 그 양쪽 곁에는 부모와 자녀, 배우자 등 재판의 결과를 함께 기다리고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 변호사는 이들까지 합하면 형사사법절차 안에서 마주한 사람이 1만명은 넘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피고인, 피해자,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이들까지. 수만 가지의 회한과 고통, 그 아픔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목격자”라고 표현했다.

재판이 끝나면 판결이 남는다. 한동안 책상을 가득 채웠던 기록도 언젠가는 폐기된다.

박 변호사는 그 기록 안에 담겼던 사람들의 다음 삶을 바라며 이런 말을 남겼다.

“재판이 끝나고 기록이 폐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들의 노(怒)와 애(哀)는 잘 갈무리되고, 남은 희(喜)와 락(樂)이 앞으로의 삶을 채우길 소망합니다. 더불어 나에게도 새로운 기쁨과 안식이 찾아오기를”


[뉴스가 지나간 뒤에도 현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 사건과 사회 변화의 한가운데서 이를 가장 가까이 지켜본 사람들의 시선으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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