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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서방, 미국과 관계는 자연히 경색했다. 외부 자본이 리비아 석유에 접근이 봉쇄된 데 따른 여파가 첫째였고, 이스라엘과 친교를 맺은 이들이 팔레스타인을 돕는 리비아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카다피는 아랍 우선주의자여서 애초부터 궁합이 맞질 않았다. 청년 장교 시절 영국 군사학교에서 연수했는데, 런던은 한사코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슬람 신자로서 ‘대영제국’ 수도를 방문하는 데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서방과 관계가 파국을 맞은 것은 1988년 12월 발생한 ‘로커비 사건’이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 공항에서 이륙한 미국 팬암 여객기가 폭발했다. 이로써 탑승객 270명이 희생됐는데 개중에 189명이 미국인이었다. 배후는 리비아로 밝혀졌다. 이로써 리비아는 유엔 제재를 받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다.
소련이 붕괴하고 저유가가 지속하면서 카다피도 백기를 들었다. 2000년대 들어 반미 정책을 접고 대량살상무기도 자진 폐기했다.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도 빠지려고 테러 단체와 자발적으로 관계를 끊기도 했다. 시들한 경제를 살리려고 한 조처였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1년 1월 국경을 맞댄 튀니지에서 ‘아랍의 봄’이 시작했다.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과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각각 물러났다. 수십 년간 독재를 해오던 인물들이었다. 민주화 물결은 리비아로 향했다. 리비아 국민은 42년째 독재하고 있는 카다피의 퇴장을 요구했다. 리비아의 열악한 경제적 상황, 정권의 부정부패, 카다피 아들의 권력 세습 움직임 등으로 민심이 등을 돌린 것이다.
카다피는 무력으로 국민을 제압했다. 리비아는 내전 상태로 빠졌다. 나토군이 리비아 시민군을 도와 참전했다. 전세가 역전하자 카다피는 수도 트로폴리를 떠나 도망갔다. 좁혀드는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결국 시민군에 체포됐다. 하수구를 기어서 도망가던 상태였다. 이후 시민군에게 모진 구타를 당하고 결국 총살돼 생을 마감했다. 2011년 10월20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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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랍은 어떠한가. 이집트는 무바라크 이후 정권을 잡은 엘시시 대통령이 9년째 독재를 이어가고 있다. 아랍의 봄 발원지 튀니지도 마찬가지다. 올해 7월 튀니지 국민은 투표를 거쳐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개정 헌법에는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에게 행정·입법·사법의 권한을 전부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독재로 회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