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쇠'의 지향…'이건희컬렉션'의 시작과 끝

오현주 기자I 2021.11.23 03:30:01

△호암미술관 '야금: 위대한 지혜' 전
광석서 금속으로 가공해 형상 만든 '야금'
국보 5점 보물 2점 등 45점 엄선해 꿰뚫어
공중 띄운 거대한 용머리 '금동용두토수'
삼성 명품전 못 나왔던 '철제갑옷'도 눈길
이우환·서도호 등 현대거장 연결한 파격도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이 연 기획전 ‘야금: 위대한 지혜’에 나온 ‘금동용두토수’(10세기·보물). 높이 30.5㎝로 지붕의 추녀 끝에 끼우는 장식물로 제작됐다. 호방한 생김새도 단박에 시선을 끌지만 육중한 이 청동 덩어리를 허공에 띄운 전시기법도 눈을 붙든다. 받침대에 놓는 대신 아크릴판에 철심을 박아 고정시켰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용인=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유독 가을에 일이 많은 곳이다.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1910∼1987) 회장이 떠난 때가 가을이더니, 그의 아들 이건희(1942∼2020) 회장도 그 계절에 떠났다. 해마다 삼성가 선영이 있는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인근이 ‘조용하게 부산스러운’ 이유다. 그 분위기에 늘 고즈넉한 들러리가 됐던 곳이 호암미술관인데, 올해는 그 ‘들러리’를 떼어내고 중심이 된 듯하다. 많게는 한 주에 7000여명까지 들었다니 말이다. 안팎으로 어수선한 세상을 향해 굳게 걸이를 채웠던 미술관이 재개관을 알리며 오랜만에 기획전을 꺼내놓으면서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호를 딴 호암미술관은 이 회장이 타계하기 5년 전인 1982년 개관했다. 섣불리 품에 들이는 걸 허락하지 않을 만큼 고미술품에 관해선 까다롭기 그지없던 그이가 30여년 동안 수집한 1200여점 소장품을 주춧돌로 삼았다. 2004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삼성미술관 리움이 들어서자 외형은 자연스럽게 구분됐다. 호암의 고미술과 리움의 현대미술로. 물론 리움의 소장품에 고미술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호암미술관 ‘야금: 위대한 지혜’ 전 전경. 앞에는 조선 초기에 제작한 ‘금동보살좌상 2구’(15세기) 중 하나가, 뒤로는 고려시대 제작한 ‘철조여래좌상’(10세기)이 보인다. 티베트 불교미술 양식을 반영한 화려하고 부드러운 금동상, 거칠고 강인한 시대상을 잔잔하게 미소 띤 얼굴에 감춘 철불. 그 조화와 대비를 한눈에 들일 수 있게 배치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어쨌든 놓인 곳이 용인이든 한남이든 말이다.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 취향도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던 터라 그 1200여점은 1만 2000점을 간단히 넘겼고, 혹여 10만 2000점까지도 셌으려나. 장르로 따지자면 토기·도자기, 금속·서화, 목기·석물, 불화·민화 등, 시대로 따지면 멀리 철기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가치로 따지자면 희귀·유일본에 보물·국보가 즐비한, 어느 박물관이 이보다 치밀하고 집요할까.

작정하고 써내려간 역사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때론 결과가 그렇게 읽히기도 한다. 여기서의 시작이 결국 세상에 알려진 ‘이건희컬렉션’의 단초였던 셈이니까. 지난 4월 전국으로 흩어진 2만 3000여점의 태생이 호암미술관이었던 거다.

‘용두보당’(10∼11세기·국보). 불·보살의 위신을 나타내는 장엄용 깃발을 뜻하는 ‘당’을 1m 높이 ‘미니어처 버전’으로 만들었다. 끝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머리가 달렸다. 상상의 동물 용을 불교미술에 들인 고려 공예품의 대표작으로, 귀족집에서 행해지던 신앙행위의 단면을 설명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철제갑옷, 예전 리움·호암이라면 못 나올 작품”

그중 철이고 쇠다. 한동안의 침묵을 깬 기획전이 말이다. 철과 쇠가 소재인 고미술품 45점을 골라낸 ‘야금: 위대한 지혜’ 전이다. 전시작 대부분을 호암·리움미술관의 소장품에서 꺼내놨는데, 이 가운데는 국보 5점, 보물 2점, 국가무형문화재작품 5점 등이 점점이 박혀 자리를 잡았다. 삼성과 연관된 전시에 우수수 쏟아지는 국보급들이야 이젠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야금’은 광석에서 쇠붙이를 골라내거나 합금을 만드는 일. 전시는 그 해석을 좀더 확장했다. 정련하고 다듬어 사용목적에 맞는 형상을 만드는 과정으로, 또 위대한 지혜가 됐던 시대의 동력을 이끌어 한 공간에 곧추세우는 일로. 덕분에 길게 잡아도 삼국시대가 처음이던 고미술품 전시가 영역을 수백년 넓혔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끔찍이 아꼈다는 ‘가야금관’(5∼6세기·국보). 금과 옥을 어울린, 가야의 황금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온존하는 형태를 갖춘, 현존하는 단 하나뿐인 가야금관이기도 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출발이 청동기시대다. 고대 지식인이던 샤먼이 썼다는 거울문양 제기인 ‘다뉴세문경’(BC 4∼3세기), 전쟁에서 살아남은 ‘세형동검·동모’(BC 1세기·국보)를 첫눈에 뒀으니까. 이중 ‘세형동검’은 공개 자체가 처음이란다. 가야시대로 넘어와서는 바로 ‘금관’(5∼6세기·국보)으로 뛰었다. 이병철 회장이 끔찍이 아꼈다는, 순금도 모자라 옥까지 박아 야금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빛덩이는 현존하는 단 하나뿐인 가야금관이다.

하지만 금관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게 있다. ‘철제갑옷’(4∼5세기)이다. 누군가의 머리가 아닌 가슴을 지켰을 갑옷은 가야뿐만 아니라 호암도 바꿨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광배 책임연구원은 “예전의 리움·호암이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작품”이라고 단언했다. 명품·명작뿐이던 그간의 전시에 녹슨 갑옷은 낄 자리가 없었다는 걸 에두른 거다.

가야시대의 ‘철제갑옷’(4∼5세기). 누군가의 머리가 아닌 가슴을 지켰을 갑옷은 가야뿐만 아니라 호암도 바꿨다. 예전의 리움·호암미술관의 전시라면 못 나왔을, 명품이 아닌 ‘녹슨 갑옷’이란 뜻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금속을 소유한 이들이 최고 권력층’이던 고대 예술사는 불교미술이 활성화되며 급반전을 맞는다. 현존하는 고미술품의 80%가 불교미술이라니 말이다. 금속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왕만큼이나 동등한 지위를 가졌던 부처상이 터져나오는데, 이번 전시에도 ‘최초 공개’란 수식이 달린 ‘은제아미타여래삼존좌상’(14세기)을 비롯해 ‘금동여래보존좌상’(14∼15세기), ‘금동보살좌상 2구’(15세기) 등이 자태를 뽐냈다.

유일하게 금이 아닌 철을 주조로 만든 불상 ‘철조여래좌상’(10세기)의 의미도 적잖다. 왕과 동등하고 싶었던 지방 호족들이 주로 제작했다는 철불을 두고 이 연구원은 “금을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철의 주조가 더 어렵기 때문에 호족의 도전을 자극했을 것”이라 귀띔했다. 말랑한 금과 달라 디테일한 구현이 어렵고 마디마디를 연결해야 하는 기법 때문에 늘 철불에는 손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호암미술관 ‘야금: 위대한 지혜’ 전 전경. 앞쪽으로 고려시대 제작한 ‘철조여래좌상’(10세기)이, 뒤쪽으로 조선 초기에 제작한 ‘금동보살좌상 2구’(15세기)가 보인다. 늘 정면으로만 봐야 했던 고미술품 전시작의 360도 회전각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변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정점은 ‘용머리’로 찍었다. ‘당’(불·보살의 위신을 나타내는 장엄용 깃발)의 1m 높이 ‘미니어처 버전’에 용머리를 매단 ‘용두보당’(10∼11세기·국보), 추녀 끝에 끼우는 장식물로 제작한 거대한 용머리 ‘금동용두토수’(10세기·보물)가 나왔다. 특히 ‘금동용두토수’는 고미술품 전시에선 매우 드문 전시기법이 눈을 붙든다. 받침대 없이 아크릴판에 철심을 박아 육중한 청동 덩어리를 허공에 띄웠는데 현대 디스플레이의 퍼포먼스와 고려 불교미술의 디테일이 제대로 만난 격이랄까.

‘금동용두토수’(10세기·보물)의 왼쪽 모습. 호방한 생김새도 단박에 시선을 끌지만 육중한 이 청동 덩어리를 허공에 띄운 전시기법도 눈을 붙든다. 받침대에 놓는 대신 아크릴판에 철심을 박아 고정시켰다고 했다. 눈과 머리 쪽에 바로 옆에 서 있는 ‘용두보당’이 비치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험한’ 디스플레이 공정을 거쳐 전시작이 된 작품은 또 있다. ‘선림원종’(804·복원품)이다. 천장에 H빔을 박고 쇠사슬에 내려 매달았는데, 기성품을 구할 수 없어 사슬의 제작만을 위해 전통대장간을 수소문했단다. 전시작은 1948년 발견된 이후 방치했다가 한국전쟁 때 완파됐는데, 국가무형문화재 주철장 원광식(79)의 복원으로 다시 모양을 갖췄다. 이 연구원은 “범종 제작은 야금 문화의 최고봉”이라며 “당시 국가가 극복해야 할 모든 기술이 들어간, 지금으로 치면 인공위성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위대한 지혜’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통일신라시대 원종 804년에 주조한 ‘선림원종’의 복원품이다. 1948년 강원도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이후 방치했다가 한국전쟁 때 완파된 것을 국가무형문화재 주철장 원광식의 복원으로 다시 모양을 갖췄다. 전시를 위해 범종을 매단 쇠사슬을 전통대장간에 의뢰해 만들었고, 바닥에는 주조에 사용된 고운 모래를 쌓아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공사 중 전시 감행…콘크리트 골조까지 드러낸 ‘변화’

내년이 40주년이다. 지난해부터 리움미술관이 보수공사에 들어서자 “호암미술관은 뭘 할 건가”를 고민하다가 동반 리모델링에 나서자고 했단다. 이번 전시는 그 과정이 채 끝나지 않은 ‘공사 중’에 열었다. 어두운 고미술품 전시에서 동선을 만드는 가벽들이 사라졌고 천장이 높아졌다. 덕분에 드러난 건 치장 없는 텅 빈 공간과 콘크리트 골조. 평소라면 철저하게 감췄을 속살까지 꺼내놓으며 미술관은 ‘변화’를 전시한 거다.

덕분에 늘 정면으로만 봐야 했던 전시작의 360도 회전각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전시 취지에 맞게 기둥까지 철로 제작했다”는 아크릴판 쇼케이스를 한 바퀴 돌며 앞뒤와 좌우를 자세하게 뜯어보는 관람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박석원의 청동조각 ‘초토’(1968). 황폐화한 흔적이나 불에 탄 흙이란 뜻이다.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대한 울분을 비유했다. 뒤로는 이우환의 ‘관계항’(1982)이 보인다. 큰 돌을 철판 위에 돌을 올려, 자연과 산업사회의 관계 또 만남을 상징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고미술품 전시에 현대미술품을 들인 것도 ‘평소 안 하던’ 일이다. 이우환·박석원·정광호·서도호·양혜규·존배·조환 등의 조각·설치작품 8점, 김수자·박경근의 영상 2점을 들여 ‘지향’을 만들었다. 철·쇠의 지향과 미술관의 지향, 둘 다다. 전시는 12월 12일까지. 이건희컬렉션의 시작을 만든 호암미술관이 올 한 해 ‘이건희’란 이름으로 걸어온 지난한 여정에 마침표까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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