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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통령은 특별 담화에서 개헌으로 인한 혼란 지속 시 공권력을 투입할 수도 있다는 뜻도 피력했다. 그는 “개헌 논의 지양을 선언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질없는 개헌 타령에만 골몰하여 불법과 폭력으로 사회 혼란을 조성하고 국민 생활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본인은 국민 생활의 안전과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는 모든 권한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의 단임 의지가 확고한 이상, 사실 헌법과 관련하여 본인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집권 여당이 주장한 ‘의원내각제’는 “민주주의의 꽃”으로 극찬한 반면,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만 고집한다’며 비판했다.
전 대통령이 4.13 호헌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은 지지부진한 개헌 논의로 정국 불안이 지속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서 1985년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야당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정통성 문제를 본격 지적하기 시작한다. 연장선상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1000만 개헌 서명 운동을 펼치면서 개헌 논의는 더욱 확산됐다.
국민의 고조되는 개헌 열망과는 별개로, 국회에선 1986년 7월 30일 여야 만장일치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됐으나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은 직선제를 주장하며 개헌 논의는 평행선만 달린다. 그러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현 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자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거세지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목소리 역시 더욱 커진다. 단순 쇼크사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당국의 최초 발표와는 달리 뒤늦게 박 군의 죽음이 고문·폭행 치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개헌 요구 시위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불안을 느낀 전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전격 단행했다. 바로 4.13 호헌 조치다. 호헌은 기존의 헌법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소위 ‘체육관 선거’로 불린 대통령 간선제를 계속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4.13 호헌 조치는 사회 안정이라는 정권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급기야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렸다. 6.10 민주 항쟁이라 명명된 바로 그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과 타협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민들은 적당히 멈추지 않았다. 국민들의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구호는 높아져만 갔다. 같은 달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 명 이상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등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자 전두환 정권도 어쩔 수 없이 4·13 호헌 조치를 철회한다. 이어 29일에는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6·29 민주화 선언’이다.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에서 5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시위에 참여해 얻은 결과물이었다.
전두환 정부 입장에서 4.13 호헌 조치라는 승부수는 최악의 악수(惡手)가 됐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치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시계를 앞당긴 사건으로 평가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