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와 정씨는 자신들이 불법 게임사이트를 운영하던 필리핀 마닐라로 IT 개발자 A씨(당시 44세)를 유인해 사망하게 한 혐의를 받았다. 한 가정이 번듯한 가장이었던 A씨는 어쩌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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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의뢰받은 프로그램을 제작해 납품했지만, 김씨는 강한 불만을 갖게 됐다. 약정기한을 지키지 못했고 제공된 게임장비도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과거 조직폭력 전과가 있던 김씨는 ‘A씨를 혼내줘야겠다’고 마음 먹고, A씨에게 필리핀 입국을 요구했다. A씨의 필리핀 입국에는 김씨의 부하 조직원이자, 조직폭력배였던 정씨가 동행했다.
김씨는 A씨가 2010년 11월 11일 필리핀에 입국하자마자 무차별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마닐라공항에서 A씨를 차량에 태운 후 ‘게임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해 약간의 언쟁이 벌어지자, 현지 보디가드에게 총을 넘겨받은 후 “쏘아 죽인다”고 겁박했고, 정씨는 A씨를 무차별 폭행했다.
김씨는 이후 불법 게임사이트 사무실에 있던 숙소로 A씨를 끌고 간 후, 같은 달 14일까지 몽둥이 등으로 A씨를 마구 때리고 가혹행위도 일삼았다. 정씨는 숙소에서 A씨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금하고 때때로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무차별 폭행으로 A씨의 심각한 상해를 입게되자, 정씨는 김씨 지시를 받고 같은 달 15일 한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A씨를 데리고 가 입원을 시켰다.
◇위중한 상태 피해자, 강제 퇴원시켜 하루 뒤 사망
하지만 A씨의 위중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정씨는 이틀 후인 11월 17일 병원에서 A씨를 강제로 퇴원시켜 다시 숙소로 데리고 왔다. 숙소에서 방치된 A씨는 결국 11월 18일 숨졌다. 김씨는 A씨 사망 이후에도 또 한 번 몹쓸 짓을 했다. 김씨는 자신의 경호원으로 활동한 현지경찰 2명에게 200만원씩 주고 시신을 화장하도록 해, 사체를 은닉했다.
필리핀에 출국한 A씨로부터 연락이 끊기자, A씨 가족들은 A씨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 와중에 가족 중 한 명은 김씨와 전화통화까지 했지만 “행방을 전혀 모른다”는 답만 들었다.
김씨는 그 이후에도 필리핀에서 1년 4개월 넘게 불법 게임사이트를 운영했다. 잭팟을 조작해 이용자들을 끌어모았고, 실제 이용자들이 당첨금 환전을 요청할 경우 “당첨금 10% 수준의 환전수수료를 먼저 입금해야 한다”, “당첨금 22%를 소득세로 선입금해야 한다” 등의 거짓말로 돈만 받아 챙기고 당첨금은 지급하지 않았다. 김씨가 이 기간 챙긴 불법수익만 87억원이 넘었고, 이중 한국인을 상대로 한 수익만 48억원에 달했다.
김씨 등의 범행은 창원지검이 2012년 12월 ‘한국인 1명이 필리핀에서 불법 게임사이트 운영자들에게 살해돼 시신이 유기됐다’는 내용의 제보가 오면 꼬리를 밟혔다. 검찰은 제보를 근거로 전담팀을 구성해 본격 수사에 착수해 김씨 등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김씨 등은 2012년 3월 불법사이트 폐쇄 후 한국에 들어와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씨 등은 수사 초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김씨는 “게임 프로그램 문제로 필리핀에 입국했던 A씨를 만난 것은 맞지만, 숙소에서 하루 이틀 머물다가 볼일이 있다면서 나간 후로는 연락이 끊겼다”며 “A씨가 사망한 사실조차 모른다”고 주장했다. A씨 시신을 찾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수사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김씨의 주장은 공범 중 한 명의 휴대전화에서 발견된 한 ‘편지 사진’에 의해 거짓임에 드러났다. 필리핀에서 김씨 뒤를 봐줬던 한 한국인 사업가 B씨가 2012년 11월 김씨에게 보냈던 편지엔 “빌려간 돈을 갚지 않으면 A씨 관련 사건 내용을 수사기관에 폭로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B씨는 전화와 이메일 등을 통해 검찰에 사건 내용을 진술하기도 했다.
◇주범, 범행 직후 49제 지내고 위패 모시기도
결국 김씨도 이 같은 상황에서 세 번째 검찰 조사에서부터 “A씨를 때려 사망에 이르게 했고, 사체를 화장했다”고 범행을 인정했다. 김씨는 구속된 이후 소상하게 자신의 범행에 대해 털어놓으며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사죄의 뜻을 수차례 밝혔다. 그리고 범행 직후 경남의 한 사찰에서 A씨에 대한 49제를 지내고, 위패를 모셨던 것도 뒤늦게 털어놨다.
김씨와 달리 공범 정씨는 A씨 사망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그는 “김씨의 폭행을 말리는 차원에서 A씨를 몇 차례 가볍게 때린 것이 전부이고, 피해자를 감금한 사실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검찰은 김씨와 정씨를 A씨 사망과 관련해 상해치사, 감금 등의 혐의로 기소했고, 불법 게임사이트 운영과 관련해선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위반,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두 사람은 1심 재판 도중 피해자 유족과 합의를 했다.
1심은 김씨와 정씨에게 각각 징역 9년과 징역 4년을 선고했다. A씨에 대해선 81억원의 추징도 명령했다. 1심은 김씨에 대해 “A씨를 도주하지 못하도로 감시하면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잔혹하게 괴롭혀 사망에 이르게 했고, 범행 은폐를 위해 피해자 사체를 화장해 유족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질타했다.
다만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을 달게 받겠다는 각오로 용기를 내어 수사기관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합의로 인해 유족들이 처벌을 원하는 않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1심은 정씨 양형에 대해선 “과거 폭력조직에 가담해 여러 차례 폭력전과가 있음에도 김씨와 함께 A씨를 감금하고 폭행해 심각한 상해를 가했고, 피해자를 임의로 퇴원시켜 사망에 이르게 해 죄질이 가볍지 않다”면서도 “폭행 정도와 횟수가 중하지 않고, 유족과 합의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김씨와 정씨 모두 1심 판결에 대해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2심은 김씨 항소를 기각하는 한편, 정씨에 대해서만 “추가로 유족들과 합의를 했고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1심의 형량은 너무 무겁다”며 징역 3년으로 감형했다. 김씨는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가 결국 상고를 취하해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