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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화려했던 전성기일 수도, 사무치게 후회되는 순간일 수도, 아름다웠던 유년일 수도 있다. 중국의 스타작가 장샤오강(張曉剛·64)에게 그것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문화대혁명(1966∼1976)이다.
1958년 따뜻한 남쪽지방 쿤밍에서 태어난 장샤오강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던 1966년, 여덟살이었다. 극도로 불안한 시절이었다. 정부에서는 우파, 다시 말해 반동분자 색출을 대대적으로 실시했고, 지역단위마다 일정비율 이상을 지명해 보고하라고 했다. 네가 아니라면, 내가 우파가 돼야 하던 때.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희생양일 될 것인가만 필요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주민들이 장샤오강의 집에 들이닥쳐 그의 부모에게 잘못을 자백하라고 협박했다. 결국 그들은 3년 동안 ‘재교육’을 받으러 집을 떠나야 했다.
여덟살부터 열여덟살까지, 소중한 유년의 때를 장샤오강은 그렇게 보냈다. 딱히 힘들다고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7년이 지나 우연히 발견한 그 시절의 가족사진은 그의 안에 숨죽이고 있던 기억을 기어이 소환해냈다. 과거를 피해버리지 않고 직시한 덕분에 장샤오강은 ‘핏줄-대가족’ 시리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를 일시에 월드스타로 만들어준 바로 그 작품이다.
그중 한 점인 ‘핏줄-대가족: 가족 no.1’(1993)은 부모와 아이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그대로를 그린 것이다. 특별한 구성도, 구도도 아니지만, 그의 그림은 묘하다. 괴이한 느낌까지 풍긴다. 몇 가지 요소 때문이다. 먼저는 인물이다. 어머니는 화면 밖 어딘가를 응시한다. 아이는 사시다. 정면을 보는 이는 아버지뿐이지만, 그 눈동자조차 멍하다. 가족 모두 표정이 없다. 몸은 사진관에 있지만 영혼은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하다. 화면 전체에 사용한 흐리멍덩한 회색까지 몽롱함을 더한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던 시절의 ‘기억’과 ‘불안’
이 그림은 장샤오강의 부모와 형을 그린 것이지만, 당시 중국 어떤 가족의 사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모두 같은 옷에 같은 모자,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결코 ‘모두가 똑같이 생활하고 생각한다’가 아님에도 개성이 허용되는 범위는 너무 작았다.
그럼에도 장샤오강은 ‘남과 다름’에 유달리 공포를 느꼈다. 어머니가 앓던 정신질환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조현병을 앓았는데 그로 인해 이웃에게 질타를 받을까 늘 염려했던 것이다. 막내아들이던 장샤오강은 깔깔 웃다가도 돌연 화를 내는 어머니가 때때로 두려웠고, 혹여 그 병이 자신에게도 발현될까 걱정했다. ‘핏줄-대가족’ 시리즈에서 어딘지 모를 불안이 느껴지는 것은 그의 이런 심리가 반영돼서다.
그림에서는 사람의 얼굴 쪽에 색채가 갑자기 이상해지는 부분이 드문드문 보인다. ‘컬러패치’라고도 불리는 이 장치는 장샤오강이 화면에 랜덤하게 삽입한 것으로 급작스레 기분이 변하던 어머니의 증상을, 누구라도 숙청 대상이 될 수 있던 당시 중국의 사회를, 그 안에서 장샤오강이 느꼈을 불안감을 함축한다. 화면 전반에 아주 가늘게 그어진 붉은 선도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아버지의 귀에서 아이의 배꼽으로, 다시 어머니의 가슴으로, 또 아이의 귀에서 아버지의 심장으로, 규칙 없이 끊어질 듯 이어진 가느다란 선은 제목이 말하듯 ‘핏줄’이다. 가족이 무한정 확대돼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중국의 문화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연결이란 게 사실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30대 중반에 이미 대스타로 떠올랐지만 사실 장샤오강의 청춘은 답답했다. 미술대 졸업 후 실직기간을 거치기도 했고, 마음고생으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소련식 사실주의부터 장 프랑수아 밀레, 빈센트 반 고흐, 초현실주의까지 섭렵했지만 세상을 뒤집을 만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전환을 맞은 것은 유럽 땅을 밟은 1992년이었다. 우상이던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마주한 뒤, 서양의 명화만 좇다간 ‘아류’밖에 되지 않겠다는 위기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중국의 화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결심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헤매던 중 10여년 전 가족사진에서 중국인의 얼굴을 본 것이었다.
장샤오강의 작품은 중국의 작가가 중국의 사회, 그 안에서 살던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등장인물조차 중국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적이다. 그러나 보편적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족사진을 찍어서만은 아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본질, ‘기억’과 ‘불안’이란 주제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누구나 하나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빛바랜 기억,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내면의 불안을 건드린다. 이국적이기에 새로우면서도 보편적이기에 공감하기 쉽다는 점. 이것이 국제미술계에 소개되자마자 미술관과 갤러리, 학계와 시장 모두에서 전례 없는 주목을 받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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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핏줄-대가족’ 시리즈를 10여년 정도 지속한 뒤 장샤오강은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번에는 가족의 얼굴 대신 일상의 물건과 건물을 큰 화폭에 담았다. 그리는 대상은 달라졌지만 소재는 다시 한번 마오쩌둥의 중국을 연상시킨다.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의 침대와 소파, 역시나 찍어낸 듯 똑같은 이층짜리 시멘트 건물. 여기에 회색조의 화면이 이 개성 없는 사물들을 다시 흐릿하게 만든다. 결정적으로 전구는 불이 나갔다. 기억의 불이 꺼져버렸다는 뜻일까. 반짝하며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도,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도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장샤오강은 이 시리즈에 ‘망각과 기억’이란 제목을 붙였다. 잊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까(‘망각과 기억 no.21’ 2003).
어느덧 60대 중반이 된 장샤오강의 그림에는 여전히 문화대혁명 시기를 떠올리게 할 도상이 등장한다. ‘눈을 가린 무희(2016)와 같은 그림이 그 예다. 시공간이 명확하지 않은 방안에는 확성기가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벽돌로 막힌 창문이 보인다. 마오쩌둥 시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을 전체에 당의 메시지를 전하던 확성기와 홍위병들이 쏘아대던 총알 때문에 벽돌로 막아야 했던 창문을 기억하며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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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즘 중국의 젊은 세대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잘 모른다. 아버지 장샤오강이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1994년에 태어난 그의 자녀 역시 그 시절에 관심이 없다. 그래선가. 그림에 등장하는 소년과 소녀도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에 무관심하다. 소년은 서랍 안에 쭈그리고 앉아 책에 빠져 있고, 소녀는 아예 눈을 가려버렸다. 저 멀리 열린 문 뒤로는 아그리파 석고상이 마치 감시자처럼 이상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장샤오강의 최근 그림에는 초현실적인 면모가 눈에 띄게 강해졌다. 이는 그가 기억하는 문화대혁명 시기가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엄연한 그 역사적 사실이 점점 잊히는 현재의 상황 또한 비현실적이기 때문일 거다.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다시 말해 역사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또는 망각되는가. 우리는 무엇을 잊고, 또 기억할 것인가. 장샤오강의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