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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진짜배기는 깊숙한 곳에 들여놓는 법이다. 거기까지 이르는 길을 불편하게, 험하게 만들어 기대감을 키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떠올리고 생각하게 한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보려 하는지. 바로 여기가 그런 형국이 아닌가. 환한 화이트큐브, 세련되고 멀쩡한 공간을 떠나 한참을 내려보낸 지하, 그 촘촘한 계단 끝으로 몸과 마음을 끌어내리고 있으니.
그렇게 도달한 지점. 환풍기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그 깊은 안쪽에 ‘진짜배기’가 보인다.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에 덩그러니 올린 자전거 바퀴. 낯선 아이디어가 세운 낯선 조합으로 빚어 세상을 뒤바꾼 그 현대예술작품이 맞다.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자전거 바퀴’(1913). 그런데 정말 뒤샹의 그 작품인 건가.
그 의문은 조금만 더 신중하게 뜯어본다면 바로 풀리게 돼 있다. 바퀴를 고정하고 받치는 격인 철기둥에 뭔가 달린 게 보이니까. 눈을 바짝 붙이고 들여다봐야 잡히는 초록바탕의 작은 전자회로판이다. 마치 네임태그인 양 앙증맞게 매달려 존재감, 아니 정체성을 다시 정립하고 있다. “이것은 뒤샹의 ‘자전거 바퀴’가 아니다”라고. 그렇다. 이것은 ‘회로라벨 자전거 바퀴’(202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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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아니 지하로 내려온 김에 하나만 더 보자. ‘자전거 바퀴’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놓인 또 다른 뒤샹이 있으니까. ‘자전거 바퀴’보다 훨씬 유명한, 뒤로 눕힌 남성 소변기 ‘샘’(Fountain·1917) 말이다. 세상을 뒤흔든 여파도 더 강렬했더랬다. 100여년 전 동네 철물점에서 단돈 6달러를 주고 산 변기에 욕실용품 제조업자의 이름 ‘알 뮤트 1917’(R. Mutt)이란 서명 하나 달랑 박아 전시장에 들고 갔던 작품. 결국 전시에서 내쫓기는 봉변까지 당하지만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기어이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여기 놓인 ‘샘’은 다른 옷을 입고 있다. 1세기 전 남성 소변기만 할 크기의 작은 변기로. 사인도 ‘뒤샹 버전’에선 보지 못했던 ‘한글’이다. ‘대림 2022’(2022)라고 썼다. 변기 안쪽에 박아놓은 나비와 하트 문양은 덤이라고 할까. 역시 전자회로판을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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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디지로그’서 착안한 개념 ‘메타로그’로
“회로도에 대한 정리로 보면 된다. 언제나 환경문제를 고민해왔지만 철학적인 고리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매일 쏟아져나오는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언제까지 쓰레기로만 갈 순 없겠다 싶었던 거다.”
‘회로도 작가’로, ‘환경작가’로 이름을 알린 설치미술가 배수영(49). 21번째 개인전을 연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원에 만난 배 작가는 첫마디부터 진지했다. 적어도 이렇게 벌려둔 판이 그저 치기 어린 대가의 흉내내기는 아니었던 거다. 돌아보면, 비단 작품만이 아니었다. 배 작가 역시 그랬다. 진짜배기를 찾아가는 길이 험난했다니까. 지하로 끊임없이 스며들며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보려 하는지’ 고민해 왔던 거다. 그렇게 지난 20년간 작품활동을 짊어지고 왔다. 하지만 이내 한계에 다다랐다. 도무지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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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눈에 띈 게 있었단다. 지난 2월 타계한 ‘시대의 지성’ 이어령(1934∼2022) 선생의 대표저술 ‘디지로그’(2006). “이거다 싶었다. 19년 전 착안했고, 작품에 들인 지도 15년. 내가 연구했던 게 소통방식을 위한 회로도였으니까. 바로 디지로그를 위한 연구였구나 했다.” 다만 아날로그로 시작한 그 회로도를 어떻게 업그레이드해야 할 건가를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은 디지털로 휙휙 바뀌고 있는데 여전히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작업만 하고 있었던 거고. 그때 성큼 다가온 ‘디지로그’는 적절한 길잡이가 돼줬던 거다. ‘메타로그’란 개념은 그렇게 나왔단다. 아날로그와 메타버스를 종합하고 아우르는 시도로.
“PC판에서 따온 회로도도 따지고 보면 ‘레디메이드’가 아닌가. 재생아트를 해온 그간의 작업과도 연결된다. 뒤샹에게 받은 영향을 그동안 해온 개념미술에 살짝 얹는 오마주를 해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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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이 사실 전부라 할 만하다. ‘회·로(回·路), 메타로그’라고. 전자부속품에 불과했던 ‘회로’는 멀리 돌아온 길인 ‘회로’가 됐다. 뒤샹의 아이디어에 얹은 배 작가의 오마주 작품도 다르지 않다. 과거와 현재, 100년을 이어낸 회로인 동시에 기계미학의 생명선을 연결한 회로인 거다. ‘회로라벨 자전거 바퀴’와 ‘대림 2022’를 앞세운 전시에는 이외에도 뒤샹의 조형언어를 ‘배수영 식’으로 해석한 작품이 더 있다. 관음증을 자극하는 설치작품 ‘에탕도네’(1946∼1966)를 변형한 ‘노모포비아’(No Mobile-Phone Phobia·2022), 회화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3)를 배 작가의 로봇 캐릭터로 대신 세운 ‘계단을 내려오는 또마’(202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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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선, 그 순환에서 상생하지 못할 것은 없다”
전시에는 배 작가의 ‘시그니처’도 함께 나섰다. 흔하디 흔한 나비·새·사과·하트 등에 특별한 ‘심장’을 품게 한 건 물론 말랑한 ‘속살’까지 드러내게 한 그 작품들 말이다. 다만 이들 또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데. 평면과 입체를 오가는 일쯤은 쉽다. 이젠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에 입히는 크롬·우레탄·캔디·마블링 도장까지 신중하게 고려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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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도를 새긴 틈으로 빛을 밝히는 하트’를 한데 모은 입체설치작품 ‘추앙’(2022·가변크기), 광택 나는 스테인리스스틸 판에 날아가는 나비를 붙잡아둔 듯 입체감을 심은 부조작품 ‘운명’(Destiny·2022·91×91㎝)과 ‘내 세상’(Mamonde·2022·116.8×91㎝), 도자처럼 매끈한 캔버스에 전자회로도로 사과·나비를 형상화한 평면작품 ‘이브와 아담’(2022·110×60㎝) 등등. 전시작 40여점은 형체는 제각각이지만 배 작가가 향하는 곳을 정확히 짚고 있다. “지금껏 관계회로를 연구했지만 앞으로 잡고 나갈 것은 네트워크다. 작품을 두고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일 말이다.”
빛나는 ‘회로’를 위한 지난한 ‘회로’였는데, 그래도 용케 그 시작을 놓치진 않았구나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하는 동시에 다시 태어난다”고, “결국 그 순환에서 치유하지 못할 게 없고 상생하지 못할 게 없다”고. 오래전 배 작가가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전시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