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관광] 한땀 한땀, 장인의 손길에 새겨진 '활자'

강경록 기자I 2016.04.29 06:21:00

성공사례탐방 28 전통 맥 잇는 국내 유일 ''활판공방''
전국 누비며 활판 인쇄기구해 수리해
장인들 모셔오는 데 꼬박 3년 걸려
활자 만들기부터 인쇄까지 수작업
''천자문'' ''시를 그리다'' 등 체험 인기
"인쇄 역사 담은 박물관 만...

활판인쇄 공정 중 활자 선반에서 자모를 뽑아 배열하는 식자 작업(사진=활판공방)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 패러다임은 정부3.0이다. 개방·공유·소통·협력을 바탕으로 국민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일자리 창출과 창조경제를 지원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관광분야에서도 창조경제 실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진하고 있는 관광산업의 융·복합을 위한 다양한 사업이 그 일환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업은 ‘창조관광사업 공모전’이다. 2011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관광부문의 창업과 연계,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관광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취지 아래 ‘창조관광사업 공모전’을 실시하고 있다. 공모전의 성과는 눈부시다. 5년간 총 297건의 창조관광사업을 발굴, 그중 205개의 아이디어를 사업화했다. 또 756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이데일리는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와 공동으로 공모전에 당선한 업체 중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한 업체를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기 파주시 출판도시에 자리한 활판공방의 박한수 대표(오른쪽 두번째)와 문선공들. 납 활판인쇄방식은 주조·문선·조판·인쇄·제본의 과정을 거쳐 한권의 책을 만들어 낸다.(사진=활판공방)
◇전통 맥 잇는 국내 유일 납 활자인쇄 공정

“독일·프랑스·영국 등은 활판공방이, 이웃나라인 일본은 활판체험교육이 발달했다. 우리 활판인쇄술은 세계 최고지만 관심은 세계 최하위다.”

이번에 소개할 업체는 경기 파주시 출판도시에 자리한 ‘활판공방’이다. 국내 유일하게 납 활자인쇄 공정을 하는 인쇄소 겸 출판사다. 컴퓨터 인쇄에 밀려 위기에 처했던 활자인쇄를 부활시켜 최근 주목받고 있다. 활판인쇄는 납 활자를 배열하고 연판을 이용해 인쇄하는 방법이다. 납으로 자모를 일일이 만드는 주조부터 약 60만자가 빼곡히 들어찬 활자 선반에서 자모를 골라내는 채자, 자모를 배열하는 식자, 인쇄·접지·제본에 이르기까지 활판인쇄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책 한권을 제작하는 데 보통 두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회사의 수장인 박한수(48) 대표는 “활판공방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한국 근대 출판문화에 많은 기여를 한 금속활자 인쇄방식을 복원해 활판시선집을 펴내고 있다”면서 “30여년 전에 디지털 인쇄의 등장으로 사라진 활판인쇄는 보존성이 뛰어나고 활자가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활판인쇄로 찍은 책에는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책장을 넘길 때 들리는 손맛과 소리, 한지의 구수한 냄새 등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면서 “디지털 인쇄기로는 절대 담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진정한 명품”이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손맛과 납·지형에 의한 독특한 입체감을 주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도 매우 매력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강규상 한국관광공사 창조관광벤처 팀장은 “한국은 서양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개발해낸 활자종주국”이라면서 “내·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의 우수한 인쇄문화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체험관광상품으로 높은 점수를 얻었다”고 수상 이유를 전했다.

◇활자인쇄가 말을 걸다

박 대표의 원래 직업은 북 디자이너. 그가 활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 건 대학원에 진학해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하면서부터다. 이후 맥이 끊긴 활판인쇄를 되살리기 위해 지난 몇년간 전국을 돌며 고철이 돼버린 인쇄기기를 찾아냈다. 박 대표는 “유럽의 활판공방에 관한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자료를 접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1995년부터 국내 활자와 기계를 하나씩 모으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폐기처분한 국내 활판인쇄기를 구해 수리하고 장인을 모으는 과정에서 3년여가 걸렸다”면서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 등은 국가와 민간에서 운영하는 활판공방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종주국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활판공방 하나 없었다”고 말했다.

활판인쇄는 책 한 권을 제작하는 데 시간은 컴퓨터 인쇄의 10배, 비용은 20배 정도 더 들어간다. 경제적 이윤을 따지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 대표는 활판인쇄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에 빠져 그만두지를 못했단다. “전자식 인쇄책의 보존기간은 길어야 100년 안팎이지만 활판인쇄 방식의 책은 500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면서 “특히 외국에서는 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 등 오래 보관해야 하는 책은 지금도 활판인쇄로 찍고 있다”고 활판인쇄만의 강점을 전했다.

그러나 사라져 가는 활판인쇄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이에 박 대표는 장인들의 기술을 전수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활판인쇄는 숙련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 이 기술을 전수·전승하는 것이 관건”이라면서 “선진국들은 활판인쇄술을 현대기술의 집약체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하지만 국내에서는 인쇄술을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납 활판인쇄 방식으로 책을 만드는 공정 중 인쇄 작업 중인 문선공의 모습. (사진=출판도시 인쇄공방)
◇라이프치히인쇄박물관처럼 ‘활판인쇄박물관’ 만드는 게 꿈

활판공방은 2014년 ‘제4회 창조관광공모전’에서 입상했다. 당시 공모전 출품 아이템은 활자인쇄 체험 프로그램. 박 대표는 “일본은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종이와 활자문화가 친숙하도록 재미있는 놀이와 결합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면서 “활판인쇄가 계속 이어지기 위해선 어린아이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교육과 체험을 병행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활판공방의 인기 체험프로그램은 ‘천자문 활판인쇄와 전통 오침제본’ 과정이다. 체험은 활자찾기부터 시작한다. ‘천자문’ 뒷면에 들어갈 판권을 인쇄하려면 자기이름을 찾아 글자를 심는 ‘식자’ 작업을 해야 한다. 다음에 활자를 고정하고 잉크를 바른 후 종이를 얹어 손으로 인쇄기를 돌리면 글자가 종이에 고스란히 옮겨 앉는다. 이렇게 인쇄한 종이를 ‘천자문’ 뒷면에 잘라붙인 뒤 실을 바늘에 꿰어 오침제본을 한다. 실을 엮기 위해 뚫은 구멍이 다섯 개인 오침제본은 우리나라 전통 제본방식이다.

연령에 따라 목판인쇄와 근대 인쇄를 비교해보는 ‘인쇄의 변천사’ 체험을 비롯해 시를 읽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를 그리다’, 직접 쓴 원고 20~30자로 문선·조판·교정·인쇄를 체험할 수 있는 ‘활판인쇄 전 과정’과 ‘활판인쇄로 명함 만들기’ 등 10여가지가 있다. 1인당 체험가격은 3000~1만원 내외고, 일반인 고급과정은 3만원선이다. 매달 500~600여명의 체험프로그램 참가자가 신청하고 있다.

박 대표는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만든 책을 가져갈 수 있기에 흥미유발은 물론 만족도가 높다”면서 “금속활자 발명국의 후손으로서 장인의 기술을 젊은 세대에 전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의 마지막 꿈은 활판인쇄박물관 건립이다. 그가 그리는 박물관의 모습은 과거와 근대, 현대까지의 인쇄과정을 한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지금은 박물관 설계 작업 중. 현재 공방에 들어오지 못한 기계를 추가로 들여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자료도 더 보완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독일의 라이프치히인쇄박물관을 롤 모델로 우리의 인쇄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활판인쇄를 계승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고 소망했다.

활자들이 알알이 박힌 선반을 살펴보는 어린이 체험객들.(사진=활판공방)


활판공방에서 납 활자인쇄 방식으로 찍어낸 시집(사진=활판공방)
활판공방에서 납 활자인쇄 방식으로 찍어낸 훈민정음 해례본.(사진=활판공방)
금속활자로 직접 인쇄하고 있는모습(사진=출판도시 인쇄공방)
주조과정(사진=활판공방)
주조공 정흥택 씨가 고온에 녹은 납으로 새 활자를 굽고 있는 모습.(사진=활판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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