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살인` 苦유가..서민들의 삶이 무너진다

안재만 기자I 2012.03.07 08:07:05

트럭은 달릴 수록 손해..배는 못 띄워
난방 없이 겨울을 보내는 독거노인
셀프주유소에 女운전자 몰리는 이색현상도

[이데일리 안재만 기자] 영화 `작전`에서 대산토건 최대주주인 박창주(조덕현 분)는 약속시간에 늦자 이렇게 둘러댄다. "아이 씨, 길바닥에 무슨 차가 이리 많은지. 기름값 (ℓ당) 만원까지 올려야 돼."
 
실제로 부유층은 유가가 오르면 도로가 뻥 뚫린다고 좋아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민들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속칭 `기름밥 먹는` 직업군은 더욱 그렇다. 부유층에겐 그냥 연료에 불과할 지 모르는 기름이지만, 서민에겐 생명줄이다.

최근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서민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어민은 배를 못 띄우고 화물차 운전기사는 위험천만한 주행에 나선다. 독거 노인들은 차가운 방바닥에 몸을 눕힌 채 겨울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이들의 그늘진 삶의 단편을 들여다 봤다. 

◇ 화물차는 위험천만 주행中

인천시 중구 신흥동의 화물차 휴게소에 정차돼 있는 트럭들
4일 오전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3가의 화물차 휴게소 `내트럭하우스`에서 만난 김모(55·인천광역시 중구)씨. 15년된 11톤 화물차를 모는 김씨는 서울외곽순환도로 청계산 구간을 지날 때면 운전대를 꽉 잡는다. 그리고 변속기를 중립에 둔채 성남 나들목까지 10여킬로미터를 한번에 질주한다. 시속 90킬로미터가 최대속력인 이 화물차는 이때 시속 120킬로미터를 훌쩍 넘긴다. 이른바 탄력주행이다.

"우리들은 `후리 쓴다`, 또는 `기아를 턴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달리면 유류비를 줄일 수 있어요. 위험하지 않냐고요? 물론 위험하죠. 하지만 목숨 내놓고 달리지 않으면 두 딸의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어요."

25톤 트럭에서 먹고 자는 김성찬(59)씨는 고정 수익 없이 하루 벌어 먹고사는 화물기사, 이른바 `탕바리`다. 그는 요새 일감이 생겨도 부담스럽단다. 고유가 때문이다. 대구를 넘어가면 무조건 적자. 운행거리가 경기도를 넘지 않아야만 어느 정도 수익이 생긴다. 그는 알선소에서 대당 월 5만원 받고 빌려주는 무전기를 2대나 쓰고 있다. 좋은 일거리를 최대한 빨리 잡으려는 그만의 고육책이다. 
 
휴게소에서 만난 또 다른 김모씨는 화물차를 사기 위해 대출을 받으면서부터 인생이 꼬였다. 김씨는 "제 트럭은 달릴 수록 빚입니다"고 말한다. 트럭 할부대금 136만원이 매달 나가는데, 지금은 카드 현금서비스로 메우고 있다. "90살 넘은 양친이 살아계신데 빈 손으로 갈 수 없어 설날에도 차 안에서 소주만 들이 부었습니다."

경력 5년의 고진(29·인천시 남구 주안3동)씨는 철스크랩을 운반하는 방통차를 몬다. 그는 요새 건설경기 악화 때문에 편도로만 화물을 싣는 일이 잦다. 그는 "아이들은 커가는데 통장 잔고는 15만원이 전부입니다. 도대체 경기는 언제 좋아지고 기름값은 언제 안정될까요"라고 토로했다.

◇ 항구를 떠나지 못하는 배

지난 5일 오전 경기 시흥시 월곶항. 150여척의 통통배는 서로의 몸에 의지하듯 꽁꽁 묶여 있다. 7톤이 넘는 큰 배는 15척 정도에 지나지 않고, 물속에 있어야 할 어망 수백더미는 천막에 가려져 있다.

왜 배들이 묶여만 있을까. 7.31톤 사이즈 남영호의 선주 김모씨(52)씨는 "요즘 물건이 없어서 배들이 나가지 않는다"면서 "기름값이 비싸 쉬는 배가 많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여기 등록된 작은 배 중에 조업을 나가는 배는 20척 남짓"이라고 전했다.

인천 소래포구의 한 어민. 방금 조업을 마쳤다는 그는 기름값도 못 건졌다고 설명했다.
1.98톤 사이즈 소형선을 임대해 조업하는 김주호(55)씨는 12일째 조업을 못하고 있다. 한번 나가는데 휘발유 반드럼(100ℓ)이 드는데, 가격이 11만원이다. 김씨는 "나가면 본전을 못찾는다. 담배만 피우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인천 소래포구의 성덕호(9.77톤) 선장 문모씨(55)씨는 "원자재값, 기름값을 아끼려고 어민이 직접 소매에 나서는 일이 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덕열(39)씨는 "권리금 1억원을 받고 어업을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생업을 포기하는 어민이 늘고 있다는 건 경인북부수협의 설명으로도 확인된다. 수협에 따르면 조합원의 면세유 총 사용량은 2년 사이 44.4%나 줄었다. 정부가 면세유를 지급하는데도 어민들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어민 송모씨는 "숭어는 kg당 가격이 수년째 1만원을 넘지 못하고 꽃게는 고작 kg당 2만5000원이다. 꽃게 30kg를 잡아야 수지가 맞는데 누가 조업에 나가겠느냐"고 반문했다.

◇ 노인들은 추위를 버틴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노원구 상계동 103번지 양지마을. `부자가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부동산 중개업소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여기가 서울인가를 의심케 하는 낙후된 마을이 펼쳐진다.

마을 입구에서 담배가게를 운영하는 염학순(79) 할머니는 한달 수입이 30만원 가량이다. 턱없이 적은 그 돈에서 세금을 내고 식료품을 사고 임대료를 낸다. 그러다보니 난방은 꿈도 못 꾼다. 아침에 잠깐 켜놓고 하루 종일 버티는 게 할머니의 일과다.

"연탄보일러는 놓는 비용이 너무 비싸. 전기장판도 비싸고. 보일러를 놔준다고 해도 반갑지 않아. 방값이 비싸질 것 아냐? 겨울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노원구 중계본동 104동. 주민들이 백사마을이라고 부르는 이곳도 서울에서 몇 남지 않은 달동네의 한 곳이다. 시멘트를 아무렇게나 들이부은 듯한 오르막길을 따라 집들이 따개비처럼 달라붙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양지마을처럼 이곳에서도 심심찮게 하얗게 탄 연탄과 LPG통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 또한 연탄보일러를 갖고 있는 집은 주변의 부러움을 산다. 연탄은 장당 가격이 600원으로 저렴하고, 지방자치단체나 봉사단체, 교회 등에서 후원해 주기 때문이다.

노원구 상계동 양지마을의 오르막길.
이곳에서 기름을 파는 대원대리점 직원 김모씨(60)는 고유가 여파를 톡톡히 느끼고 있다. "매출이 50% 줄었습니다. 노인네들이 그냥 악으로 버티는 거예요. 리터당 25원만 올라도 드럼당 5000원 차이가 납니다. 어려운 사람들은 계속 어려운 거죠."

◇ 셀프주유소에 몰리는 시민들

고유가는 일반 시민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4일 오전 서울 서초구 SK태봉셀프주유소를 찾은 주태석(38)씨는 "셀프주유소도 가격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다른 곳보다는 싸다.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날 전국 평균 휘발유값은 리터당 2087원. 하지만 이곳은 2017원이었다. 도로는 한산했지만 손님은 끝없이 들어왔다.

셀프주유소에 여성 고객이 늘어난 점도 변화된 모습이다. 강북구 GS칼텍스직영셀프주유소 미아점을 찾은 김은경(30)씨는 능숙하게 주유기를 빼들어 차의 주유구에 꽂았다. 그는 "처음 혼자 기름을 넣을 때는 낯설었지만 하다보니까 괜찮다"고 웃었다.

이곳의 한 직원은 "예전에는 귀찮다고 셀프주유소를 기피하는 현상이 많았는데 요새는 여성 고객도 많다"고 설명했다.

기름값을 놓고 실랑이도 벌어진다. 정덕원 GS직영셀프주유소 미아점 부장은 "(다른 주유소와) 가격 차가 크지 않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이 꽤 많다"고 전했다. SK태봉셀프주유소에서도 한 고객이 사무실을 찾아와 "직접 주유하는데 뭐 이리 비싸냐"고 따지는 모습이 비쳐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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