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학선기자] 채권시장의 주도권이 재정경제부에서 한국은행으로 넘어가고 있다. 재경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한은이 지난 8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사뭇 독자 행보를 걷는 모습을 보이자 채권시장에서 "재경부를 따를 때가 아니라 한은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박승 한은 총재는 9월중 콜금리를 동결한 직후 "이제 통화정책의 점진적인 방향조정을 검토해야할 단계에 이르렀다"며 "다음달 금통위에서 콜금리 인상을 진지하게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기회복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겠다던 기존 방침에서 180도 선회한 발언이다. 박 총재는 또 "금리를 한 차례 올려도 그것은 현저히 경기부양적인 것"이라며 금리인상이 한 차례에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내비쳤다.
놀란 것은 재경부였다. 한은의 콜금리 동결 때마다 "금통위 결정을 존중한다"던 재경부는 "박 총재 개인의견일 뿐"이라며 금리인상의 의미를 깎아내린데 이어 "금리인상의 명분이 약화되고 있다"며 이른바 `금리인상 물타기`에 나섰다.
하지만 재경부를 바라보는 채권시장의 시선은 이미 싸늘해질대로 싸늘해진 뒤였다. 시중은행 한 딜러는 "신뢰측면에서 볼 때 재경부 말은 좀 그렇지 않냐"고 반문한 뒤 "이제 한은과 재경부의 거리두기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무게중심, 한은에 실린다
그동안 채권시장의 중심은 한은보다 재경부에 있었다. 재경부가 콜금리 동결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낼 때마다 채권시장은 금리 끌어내리기에 바빴고 한은 총재의 과열경고도 귓등으로 듣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채권시장을 향해 과열경고를 날렸던 한은이 불과 한달 뒤인 지난해 11월 금리를 `깜짝` 인하하는 등 갈지(之)자 행보를 보여 통화정책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선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난 7월 조용히 `저금리 약속`을 철회한 데 이어 8월에는 경기회복이 본궤도에 진입한다면 지체없이 금리인상에 나서겠다며 채권시장에 시그널을 줬다. 당시 한은은 통화정책방향을 통해 경기판단을 상향조정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관련기사 : `저금리` 약속이 사라졌다(07.07) 8월 통화정책, 이렇게 바뀌었다(8.11)
9월에는 금리인상 방침을 더욱 강도 높게 시사해 경제주체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는 쪽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 이 때문에 채권투자에서 손실을 본 기관들조차도 그동안 한은의 시그널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냐며 자성의 분위기가 일기도 했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시장은 한은이 언제 시그널을 줬냐는 반응인데 사실 그렇게 말하는 곳들도 솔직하지 않은 면이 있다"며 "강하게 시그널을 준 것은 아니지만 최근 몇달동안 경기논쟁이 벌어질 때 한은이 경기판단을 상향조정했던 것은 사실이고 시장은 그것을 간과한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시그널엔 행동이 뒤따라야
채권시장은 이제 한은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시그널만 주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연내 한은이 콜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된 것도 `이번에는 다르겠지`라는 한은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것이라는 평가다.
유재호 한화증권 연구원은 "이번 금통위 회의는 통화정책의 결정권자가 금통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며 "하지만 시그널이 액션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 연구원은 "채권시장 주도권을 누가 갖게되느냐의 문제는 결국 누가 바른 판단, 바른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있다"며 "지금은 경기회복에 따라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는 시그널을 준 한은이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커지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