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에 입문(1960년)하고 1970년까지 10년 동안 치른 32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첫 패배는 1971년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맞붙은 경기였다. 1981년 은퇴하기까지 프로 통산 61전, 56승, 5패. 이 기간에 당시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4회)와 WBC(2회)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다. 통산 타이틀 방어는 19차례 성공했다.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치른 세 차례 경기는 모두 명승부로 기록된다. 상대 전적 1승 1패로 시작한 3차전(1975년)을 앞두고 프레이저는 “신이시여, 알리를 때려눕힐 힘과 방법을 알려달라”고 기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경기는 14라운드 알리의 TKO 승리로 끝났다. 1974년 아프리카 콩고 킨샤사에서 치른 조지 포먼과 경기도 회자된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전성기를 지난 알리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스물네 살 돌주먹 포먼을 8라운드 KO승으로 이겼다.
알리의 싸움은 링 밖에서도 계속됐다. 1965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알리로 개명한 게 대표적이다. 그전까지 쓰던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는 백인이 노예에게 붙인 것이라는 이유로 버렸다. 선수생활이 흔들리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베트남 전쟁에 징집을 거부했다. 유죄 판결이 무죄로 뒤집히기까지 운동선수로서 최고 전성기(25~28세)를 허비했다. “베트공이 흑인을 무시한 적 없으니 총을 겨눌 수 없다”는 게 신조였다.
이렇듯 화려한 언변은 알리를 상징했다. 현역 시절 자신의 권투 스타일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로 규정한 어록은 유명하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is impossible)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광고 카피로서도 활용됐다.
은퇴하고 3년이 지나 얻은 파킨슨병은 화려한 언변과 현란한 움직임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인종과 종교에 대한 차별과 맞서 싸우기를 이어갔다. 파킨슨병 치료 재단을 설립해 같은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점화자로 대중에 나타나 세계인에게 희망과 감동을 안겼다. 파킨슨병 증상이 심해서 손이 떨리고 발걸음은 더뎠지만 굳은 의지로 점화에 성공했다.
2016년 6월3일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파킨슨병 합병증이 사인이었다. 고인을 추모하는 물결에 세계에서 일었다. “알리는 GOAT(The Greatest of All Time)”(버락 오바마), “가장 훌륭한 복서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람”(조지 포먼)이라는 추도가 잇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