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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988년 1월 1일 당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를 통해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안했다. 그러면서 남한의 여야 4당 총재와 김수환 추기경,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과 함께 문익환 목사를 초청했다.
같은 해 2월 대통령에 취임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당해 열리는 제24회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북방 정책(중국, 소련 등 북방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를 맺는 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또 당시 정부가 남북 동포의 상호 교류 및 해외 동포의 남북 자유 왕래 개방, 이산가족 생사 확인 등의 내용을 담은 7.7선언을 발표하자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에 대한 열망도 높아져 갔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 정책 방향과는 무관하게 남북학생판문점회담(6·10남북학생회담)과 8·15남북학생회담 출정식 등 청년·학생들의 통일 운동은 여전히 정부의 제재를 받았다. 각계의 남북 교류 제의가 거부되는 등 통일 운동에 대한 탄압도 동시에 이뤄졌다. 정부는 대북 창구 단일화 정책을 폈다. 이런 상황에서 중단된 남북 간의 대화를 위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 고문이었던 문 목사는 일행과 함께 북한의 초청에 응하는 방식으로 다음해인 1989년 방북을 결정했다.
문 목사 일행은 방북 후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만나 통일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회담을 갖고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 항’이란 제목의 공동 성명도 발표했다.
성명의 주요 내용은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7·4 남북 공동 성명 3대 원칙에 기초한 통일 문제 해결 △정치·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접촉 실현 △연방제 방식의 통일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 반대 등이었다. 문 목사 일행은 열흘 간의 방북을 마친 뒤 일본을 거쳐 4월 13일 귀국했다.
재야 및 진보 지식인들은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이 ‘순수한 통일에의 열정’에서 출발한 것으로 통일 논의의 신기원을 연 것이라며 적극적인 환영의 뜻을 표했다. 반면 정부는 이들이 귀국하자마자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해 국가보안법상 지령 수수, 잠입·탈출, 회합·통신, 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이들 일행을 구속했다.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으며 평양 도착 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 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등의 이유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공안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전민련의 주요 간부를 연행해 조사하고, 시인 고은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재오를 구속했다. 이에 더해 1989년 6월 27일 ‘서경원(당시 평화민주당) 의원 방북 사건’도 뒤늦게 알려지면서 정국은 공안 정국으로 급변했으며 재야 운동 세력과 평화민주당(평민당)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1989년에만 문 목사 외에도 소설가 황석영,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임수경,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의 방북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민주화 운동 세력 차원에서의 통일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전됐다. 문 목사는 이 사건으로 지령 수수, 잠입·탈출 혐의가 인정돼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93년 3월 사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