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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신고를 접수한 구조 당국은 대대적인 인력을 투입했다. 경찰관 200여 명과 예비군 100여 명을 동원하고 군용 보트와 미군 헬리콥터를 투입했다. 민간 선박도 구조에 합류했다. 구조작업은 배가 뒤집힌 지(오후 2시10분) 2시간여 만에 끝났다. 구조 결과는 참담했다. 승객 31명이 익사했다. 함께 탔던 소 세 마리도 숨이 끊겼다.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인 24명이 여성이었다. 승객 대부분이 김장을 앞두고 중도로 밭일을 떠난 부녀자였던 탓에 피해자가 많았다. 현장을 자력으로 탈출하기에 힘이 달린 측면도 있었다. 이들은 품삯으로 시래기와 무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고 현장은 뭍에서 2~3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문제는 육지와 거리가 아니라 배를 감싼 천막이었다. 천막 앞쪽에 앉았던 승객들은 뒤집히면서 거기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수온이 내린 차가운 호수에 빠진 것도 악재였다.
소와 사람이 한데 배에 탄 연유에 이목이 쏠렸다. 당시 도선업 단속법(현 유선 및 도선업법)은 선주가 승선 또는 선적을 제한할 수 있는 대상을 정하고 있다. 개중에 하나가 ‘승객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물건’이었다. 관계 당국과 법조계는 소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봤다. 이런 터에 격리 시설이 없으면 소를 태우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생존자 증언을 종합하면 배는 사고가 나기 전부터 소 배설물로 지저분해서 승객이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지방은 사정이 달랐다. 사고가 발생한 지역 춘성군은 소를 배에 태울 수 있는 자체 조례를 마련하고 있었다. 소는 지역민에게 가족과 같았다. 배가 기착한 중도에는 주민 350명이 소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당시 소는 기계식 농기계를 대신해 농사를 짓는 데 필수적인 존재였다. 이런 소를 불쾌와 위해를 끼치는 대상으로 치는 것은 지역감정과 온도 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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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는 애초 섬이 아니었다. 춘천 시내까지 육지로 난 길이 있었다. 의암댐(1967년 7월 완공)이 들어서면서 중도 주변으로 물이 찼다. 의암호가 형성됐고 중도는 섬이 됐다. 중도 주민은 배에 기대에 육지를 오갈 수밖에 없었다. 중도를 춘천시와 잇는 춘천대교는 2018년 1월 완공했다.
춘성군은 1995년 춘천군으로 개칭하고, 1995년 춘천시에 편입됐다. 중도는 현재 춘천시 중도동으로 자리한다. 당시 사고가 발생한 지점은 지금의 하중도 선착장 인근이다. 현재 중도에는 레고랜드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