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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6일` 신창원 검거…907일간 누린 불허된 자유[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I 2022.07.16 00:01:00

강도살인죄로 복역중 1997년 1월20일 쇠창살 뚫고 탈출
1999년 7월16일 동거녀집서 체포…탈옥 907일 만에
불우한 가정사 동정론에 경찰 수사력 도마 오르며
신창원 티셔츠 신드롬까지 인 범죄史 전무후무 인물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탈옥수 신창원은 1967년 5월 전북 김제시에서 출생했다. 모친을 일찍이 여의고 가난과 부친의 폭행을 견디며 컸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며 일탈하는 일이 잦았다. 1982년 도둑질을 하다가 소년원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만 15세였다.

1999년 7월16일 전남 순천에서 체포된 신창원씨.(사진=한겨레신문)
이후 줄곧 어두운 길을 걷는다. 1983년 서울에서 절도 행각을 벌여 붙잡혔다. 징역 8월의 집행을 1년 유예하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89년 서울 성북구에서 강도 살인죄를 저질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흉악범을 수용하는 청송교도고(경북북부제2교도소)에 수감됐다. 수형 생활이 무난해서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송됐다.

탈옥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차분하고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이뤄졌다. 교도관과 신뢰를 쌓아 모범수로 지내며 감시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매일 교화시간에 흐르는 방송 소음을 틈타서 감방 화장실 통풍구 쇠창살을 잘랐다. 이 작업에 수개월이 걸렸다. 몸놀림을 가볍게 하고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고자 몸무게도 줄였다. 교도소 외관 공사가 한창이던 1997년 1월20일 탈옥에 성공했다.

이후 약 2년6개월 동안 도주 행각을 벌였다. 동거녀를 사귀어 은신처를 확보하고, 절도로 도피 자금을 마련했다.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주요 도피처로 삼았다. 체포 직전 다시 도망가기를 반복한 게 드러난 것만 여섯 번이다.

한번은 신창원이 1999년 1월 시민 제보로 경찰에 잡혀 연행되다가 다시 탈주하는 일이 있었다. 경찰은 시민에게 현상금 지급을 거부했고, 사건은 법원으로 가서 시민의 승리로 끝났다. 현상금 5000만원은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대였다.

신창원 탓에 경찰은 죽을 맛이었다. 일부 경찰관은 체포 과정에서 신창원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화만 입었다. 검거에 실패한 경찰관 수십 명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징계를 받았다. 신창원 동거녀를 성폭행한 경찰관이 형사처벌을 받았고, 신창원에게서 뇌물을 받은 경찰관이 조사를 받았다. 신창원이 도피하면서 쓴 일기장에 이들의 비위를 적어둔 덕에 드러났다.

신창원이 검거된 때는 1999년 7월16일이다. 탈옥한 지 907일 만이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3년 전이다. 동거녀 거주지에 숨었다가 집을 고치러 온 수리공에게 정체가 드러났다. 검거 당시 심정을 묻는 언론에 신창원은 “아직은 편안합니다”라고 했다.

1999년 7월16일 검거 직후 언론 앞에 선 신창원씨.(사진=MBC 캡처)
신출귀몰하던 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대중의 이목은 윗도리에 쏠렸다. 원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프린팅된 화려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시선을 피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른바 `신창원 티`로 불리는 이 패션이 한때 유행을 휩쓰는 현상도 뒤따랐다. 신창원 신드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치기 어린 이들을 중심으로 팬카페가 생겼다. 훔친 돈 일부를 불우이웃에게 기부하는 행각에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급기야 신창원을 사칭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개중에는 실제 범행을 저질러 형사처벌을 받았다.

대법원은 2000년 2월 그에게 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 특수공무집행방해(탈옥), 절도 등 혐의에 대한 대가였다. 중형이지만 큰 의미는 없다. 앞서 선고받은 무기징역부터 먼저 복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수감된 신창원은 청송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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