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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차분하고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이뤄졌다. 교도관과 신뢰를 쌓아 모범수로 지내며 감시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매일 교화시간에 흐르는 방송 소음을 틈타서 감방 화장실 통풍구 쇠창살을 잘랐다. 이 작업에 수개월이 걸렸다. 몸놀림을 가볍게 하고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고자 몸무게도 줄였다. 교도소 외관 공사가 한창이던 1997년 1월20일 탈옥에 성공했다.
이후 약 2년6개월 동안 도주 행각을 벌였다. 동거녀를 사귀어 은신처를 확보하고, 절도로 도피 자금을 마련했다.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주요 도피처로 삼았다. 체포 직전 다시 도망가기를 반복한 게 드러난 것만 여섯 번이다.
한번은 신창원이 1999년 1월 시민 제보로 경찰에 잡혀 연행되다가 다시 탈주하는 일이 있었다. 경찰은 시민에게 현상금 지급을 거부했고, 사건은 법원으로 가서 시민의 승리로 끝났다. 현상금 5000만원은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대였다.
신창원 탓에 경찰은 죽을 맛이었다. 일부 경찰관은 체포 과정에서 신창원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화만 입었다. 검거에 실패한 경찰관 수십 명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징계를 받았다. 신창원 동거녀를 성폭행한 경찰관이 형사처벌을 받았고, 신창원에게서 뇌물을 받은 경찰관이 조사를 받았다. 신창원이 도피하면서 쓴 일기장에 이들의 비위를 적어둔 덕에 드러났다.
신창원이 검거된 때는 1999년 7월16일이다. 탈옥한 지 907일 만이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3년 전이다. 동거녀 거주지에 숨었다가 집을 고치러 온 수리공에게 정체가 드러났다. 검거 당시 심정을 묻는 언론에 신창원은 “아직은 편안합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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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2000년 2월 그에게 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 특수공무집행방해(탈옥), 절도 등 혐의에 대한 대가였다. 중형이지만 큰 의미는 없다. 앞서 선고받은 무기징역부터 먼저 복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수감된 신창원은 청송교도소에 수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