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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4000만달러(약 518억원) 조각작품이 선뜻 팔렸다. 프랑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현대미술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1911∼1999)의 대표작 ‘거미’(1996)다. 물론 한국에서 이뤄진 거래는 아니다. 지난 14∼19일 스위스 국경도시 바젤에서 엿새간 열린 세계 최대 아트페어 아트바젤에서였다.
부르주아는 60년 가까이 무명시절을 보내다 70세가 넘어 작가로 빛을 내더니 결국 세계미술계 최고봉에 오른 작가다. 1982년 70세에 여성작가로는 처음으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80세인 1999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번에 팔린 ‘거미’는 높이 335㎝, 지름 670㎝의 강철조각이다. 아트바젤에 나온 갤러리 중 하나인 하워즈앤워스가 출품했다. 아트바젤 측은 “1970년 시작한 아트바젤 사상 여성작가 작품 중 가장 비싸게 팔렸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비슷한 크기의 청동 ‘거미’가 2019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3200만달러(약 414억 7000만원)에 낙찰된 적이 있을 정도로, ‘거미’ 조각은 세계 컬렉터가 눈독을 들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부르주아가 국내에 생소한 작가는 아니다. 우선 국내에도 ‘거미’ 조각이 한 점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해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는 ‘마망’(Maman·1999)이다. 청동·대리석·강철을 소재로 한 작품은 높이 927㎝, 지름 1023.6㎝에 달하는 대형 거미.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소장한 7점 중 한 점이 국내에 8개의 다리를 뻗친 채 착륙해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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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팔린 부르주아의 작품도 있다. 6700만홍콩달러(약 95억원)에 낙찰된, 일명 바늘조각으로 불리는 ‘콰란타니아’(1983)다. 지금껏 국내 경매사에서 거래한 낙찰가 중 최고가를 쓴 동시에 2018년 국내 경매 낙찰가 1위, 또 국내서 사고판 조각 중 가장 비싼 작품으로도 여전히 그 이름을 올려두고 있다.
◇세계경제 침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미술시장
굳이 부르주아의 스토리를 꺼내든 건 이번 아트바젤의 분위기가 국내 미술시장에 미칠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금융시장에 불안감이 커지고 투자처가 위축되는 등 ‘세계경제가 무너진다’는 얘기는 어느 나라에서나 심심찮게 들리는 동일한 배경이 아닌가. 그럼에도 아트바젤에는 바리바리 뭉칫돈을 싸들고 나선 ‘큰손’들이 미술품 사들이기에 열을 올렸다니 말이다. 유럽·북미·아시아·아프리카 등 40개국에서 289개 갤러리가 참여하고 7만여명의 관람객이 몰렸다는 이번 아트바젤은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매출을 회복했다”고 전하고 있다. 여전한 코로나19 여파로 중국·홍콩 등 중화권 컬렉터가 대거 불참한 가운데도 말이다.
특별한 것은 관람객 대부분을 유럽인이 차지한 가운데, 한국인 컬렉터가 제법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부스를 차린 국제갤러리는 “예전에는 아트바젤 중에서 아시아인이 오가면 중화권 컬렉터이겠거니 했는데, 이번에는 누가 봐도 한국인이구나 했다”며 국내에 이는 미술품 투자붐이 여전히 죽지 않은 듯한 분위기를 전했다.
유영국·이우환·박서보·하종현·권영우·이기봉·양혜규 등 국내 작가와 제니 홀저, 애니시 카푸어, 줄리안 오퍼 등 해외 작가의 50∼60점을 들고 나간 국제갤러리도 성과를 냈다. 단색화 대표주자인 박서보의 ‘묘법 No.140416’(2014)을 4억여원에, 하종현의 ‘접합 94-95’(1994)를 2억여원에 거래한 중에, 유영국의 ‘워크’(1966)가 약 10억원에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담당자는 “코로나19 이전만큼은 아니라도 관람객은 크게 늘었고, 작품판매에서도 코로나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지난해보단 늘었다”며 현지에서 일었던 열기를 대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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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 바로미터 경매시장 ‘거래둔화’ 지표 떠
그렇다면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나라 밖에서 이는 이런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어갈 건가. 주식은 바닥을 치고 코인은 깨지고 펀드는 마이너스로, 투자처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번지는 있는 중에 말이다.
지난 24일 ‘6월 미술시장 현황보고서’를 낸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특정 작품의 고가 판매소식은 전체 미술시장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하거나 시장 전체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단언했다. 이어 “정부가 경기회복을 위해 다양한 부양책을 제공하면서 갈 곳 없던 자금들이 미술품과 같은 새로운 투자종목에 투입됐다”고 분석하면서도 ‘미술시장에서 위험경보를 인지하더라도 이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말한 미국 미술시장연구의 권위자 윌리엄 괴츠만(66)을 인용했다. 한마디로 “현재 시장은 물가상승이 미술품 가격을 끌어올리는 모순된 양상 보이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호황을 말하는 중에도 미술품 거래기록을 가장 선명하게 내보이는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에 ‘거래둔화’ 지표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점이 그 한 예다. 지난 5월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이 연 메이저 경매는 낙찰총액을 좌우하는 대형작품들이 줄줄이 유찰되며 휘청였다. 이우환·박서보·김환기·윤형근·김창열 등 억대 블루칩으로 꼽히는 작가의 작품들이 경매 직전 출품을 취소하거나 살 사람이 나서지 않는 유찰행렬에 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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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좀더 저렴한 가격대에 몰리는 현상도 일었던 터다. 이는 지난 22일 연 케이옥션의 ‘6월 경매’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가령 이날 4점을 출품한 이우환의 작품 중 기대를 모았던 ‘바람과 함께’(1990)와 또 다른 ‘바람과 함께’(1991)는 유찰됐다. 1990년 60호 작품은 추정가 6억 2000만∼9억원, 1991년 50호 작품은 추정가 3억∼4억 5000만원이었던 터. 대신 한지에 유채로 그린 ‘무제’(1986)와 테라코타 ‘무제’(연도미상)가 팔렸는데, 한지 작품은 낮은 추정가인 3억 6000만원에, 테라코타 작품 역시 낮은 추정가에서 가격을 못 올리고 4000만원에 판매가 됐던 거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노란 호박이 빛나는 유사한 스크린프린트 두 작품 중 추정가 2억 2000만∼2억 6000만원을 단 ‘호박 옐로우 Y’(1992)는 유찰되고, ‘호박 YB-C’(2004)가 낮은 추정가인 9500만원에 새주인을 찾았다. 이를 두고 미술시장에선 “재판매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대작으로 ‘한방’보다는 중·저가에 분산투자하는 양상이 보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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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2021년 경매당 평균 출품작이 167점이었으나 올해 6월에는 126점으로 24.5%가 감소했다”며 경매시장부터 감지되는 미술시장의 위축신호를 전한다. 특정작가에 대한 ‘쏠림’으로 ‘일단 나온 작품은 사고 보자’며 몰렸던 경향도 지적했다. “미술시장의 호황으로 수혜를 입은 이들이 급격한 침체기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경고에 가까운 우려를 내놨다. “당장의 수익을 내는 작품보단 옥석을 가린 안정성”에 대한 이같은 당부는 미술시장의 향방을 지켜보는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는 대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