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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미국 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의 숨은 주역인 김소장. 결의안이 통과되던 날 그는 관광버스를 대절해 뉴저지 포트리의 한 아파트의 할머니들에게 워싱턴 관광을 시켜드리겠다며 차에 태웠다.
버스가 워싱턴에 다다를 때쯤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들께 얼마나 주요한 임무를 맡게 되셨는지 설명드렸다. 할머니들은 결의안 통과를 호소하는 플래카드을 목에 걸고 워싱턴 의회 곳곳에서 `작업`을 벌였고, `소박한` 이 전략은 미국 의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 출신 시민 운동가인 김 소장은 위안부 결의안 통과 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 2006년에는 국내 인사로는 처음으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을 단독 인터뷰하기도 했다.
"오바마 의원을 처음 만난 건 2004년 보스톤 컨벤션 센터에서였습니다. 당시 오바마는 일리노이 상원의원 후보였죠. 그리고 2006년 뉴저주 호보큰의 한 유세 지원장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김 소장과의 대화는 워싱턴 정가의 최대 이슈인 미국 대통령 선거 위주로 흘러갔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될 것 같냐는 질문에 김 소장은 "물론 그렇다(Of Course)"고 했다.
"`블랙이 안된다`에 초점을 맞춰서 보면 안됩니다. 물론 `공화당이 아직 죽지 않았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해외 정책은 보수적이지만 국내 정책은 리버럴하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 등의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현황을 보면 오바마가 승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 소장은 우선 오바마의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을 낙관했다. 마크 펜 수석 전략가의 사임이 힐러리 클린턴측 선거 캠프에 치명타를 안겼다는 분석이다.
또 공화당과의 경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경기를 후퇴(recession) 국면까지 몰아간 공화당이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현재 미국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상황이 1991년 걸프전 이후와 유사하다고 진단했다. 당시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위 `전리품`을 획득하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가장 먼저 사회복지 예산을 줄였고, 그 여파는 푸드 스탬프에 의존해 근근히 생활하던 대도시 극빈층을 강타했다. 이로 인해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이라 일컬어지는 4·29 폭동이 일어났다.
푸드 스탬프는 미국 사회보장 제도의 하나로 정부가 최저 생활비 이하 수입의 빈곤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발행하는 식량 교환권을 말한다.
김 소장은 "91년 전쟁은 명분이 있었지만 이라크전은 거짓말 전쟁이라는 사실이 들통났고, 전쟁 5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 미군 4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며 "시민들의 정책 입안자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경제를 망친 주범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소위 있는 사람들의 부실 투자 때문이라는 점이 서민층의 분노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돌풍의 배경은 그가 기존 정치인들의 이같은 실책을 공격할 수 있는, 책임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위치에 있는 참신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사회적인 여건을 감안할 때 이는 블랙, 어린 나이, 후세인 논란 등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력한 파워죠. 오바마의 선거 캠페인이 `캠페인`(campaign)`이라기보다는 `무브먼트(movement)`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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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경제`를 제치고 `안보`가 다시 대통령 선거의 주요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이다. 김 소장은 "1월보다 안보에 대한 목소리가 커진 것이 사실"이라며 "안보 이슈가 재부각될 경우 오마바보다는 힐러리, 힐러리 보다는 매케인이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변수는 오바마의 인기가 정점을 지났다는 것. 김 소장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3월에는 결정됐어야 했다"며 "오바마 인기의 상승세가 주춤해진 상황에서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기 전까지 상승 동력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선거 자금도 문제로 거론했다. 김 소장은 "이미 대통령 후보가 결정된 공화당은 선거자금이 한 곳으로 집중돼 있는 반면 민주당의 자금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며 "미국의 권력 획득 방식이 여전히 돈을 마련해서 돈으로 표를 얻는 방식임을 감안할 때 이는 분명히 민주당에 불리하다"고 내다봤다.
화제를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렸다. 이명박 새정부의 대미 외교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자 따끔한 지적이 날아왔다.
김 소장은 "캠프 데이비드를 가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며 "`MD(미사일방어체제)에 관심 많다` 등의 발언으로 조지 W. 부시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고 무턱대고 좋아라 할 일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MD는 기본적으로 `미군이 한 명도 죽어서는 안된다`는 네오콘적인 발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민주당 외교위 위원 등 워싱턴 일각에서 한국이 이제까지 버텨오다가 너무 쉽게 MD 등의 사안에서 물러서고 있다는 지적이 흘러나오고 있다"며 "새정부의 외교 정책이 국익의 극대화에 초점을 두고 미국의 차기 권력을 조망하면서 호흡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개인사로 초점을 옮겼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시민 운동가로 활동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어려운 일에 뛰어들게 된 배경을 물었다.
"15년전 로스엔젤레스(LA) 폭동을 겪고 `법치국가에서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이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피해를 입었던 소상인들이 결국 아무런 배상도 받지 못했거든요. 그때 LA와 시카고, 뉴욕 3곳에서 유권자단체가 시작됐는데 뉴욕만 살아남았습니다"
자금난을 겪으면서 청춘을 온전히 바친 이 일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특히 9·11 테러 직후가 가장 힘들었다고. 그러나 그를 믿고 지원해 준 사람들이 `보람 있었다`는 진심어린 인사를 건넬 때 다시 기운을 차린단다.
"얼마 전 10년간 후원해주신 한 사업가께서 `당신들이 해온 일들을 보면 지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 가장 보람 있었습니다"
`30년 장기 프로젝트`라 명명한 그의 꿈은 미국내 유대인 사회의 대표적인 압력단체 이스라엘 공공위원회(AIPAC)처럼 조직력이나 영향력 측면에서 막강한 한인 단체를 육성하는 것. "고국 한반도의 안정이 미국내 한인들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그의 표정에는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