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투자한 기업들이 산업을 막론하고 ‘파산’ 카드를 꺼내드는 가운데 유독 의료기업 머릿수가 많은 이유가 무엇이냐를 묻자 국내 한 자본시장 관계자가 한 대답이다. 장밋빛 전망에 부채까지 떠안으며 인수했으나 금리 상승과 미국 내 의료 규제 변화 등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북미 기반의 의료 서비스 업체를 인수한 글로벌 운용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재무 위기에 놓인 곳은 기본이고, 파산을 바라보는 투자 포트폴리오까지 속속 생겨나면서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높은 수요와 이에 따른 수익 창출, 애드온(동종 기업 결합) 유연성 등 여러 측면에서 적합한 투자’라는 업계 인식이 무색하게도 파산을 선언하는 곳이 늘고 있지만, 산업 성장성이 두드러지는 만큼 운용사들의 의료산업 관련 투자는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
글로벌 PE들은 약 10년 전부터 인구 고령화로 세계 의료 시장이 지속 성장할 것으로 보고 의료 서비스사에 집중 투자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북미 지역은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고, 인력 공급 문제가 두드러지는 만큼,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본 것이다.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장밋빛 전망과는 달리 장기간 이어진 경기 침체와 의료산업 규제 변화, 금리 상승 여파로 글로벌 PE들이 차입매수(LBO) 방식 등으로 인수한 포트폴리오사들이 유독 휘청이기 시작했다.
차입매수란 인수 기업의 자산 혹은 현금흐름을 담보로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기업을 인수하는 M&A 기법이다. 소액자본으로도 큰 자본이득을 취할 수 있지만, 피인수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과다한 부채를 조달하는 만큼, 해당 기업의 재무구조 악화 및 도산 위험이 증가한다는 단점이 있다.
현재 가장 골머리를 앓는 곳은 지난 2015년부터 의료 서비스 업체를 공격적으로 인수해온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다. 우선 KKR이 지난 2018년 99억달러(약 12조6000억원)에 차입매수한 엔비전헬스케어는 지난달 미국 파산법 11조(챕터11)에 따라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파산법 11조는 청산보다 이익이 크다고 판단될 경우 미국 정부 관리 아래 기업회생을 꾀할 수 있는 제도다. 막대한 부채를 떠안은 상황에서 환자 급감, 인건비 상승, 미국 연방정부의 ‘의료비 폭탄 청구’ 관련 규제까지 겹치면서 회사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글로벌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스톤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다. 블랙스톤이 지난 2017년 약 7조원을 들여 차입매수한 팀헬스는 글로벌 최대 채권운용펀드인 퍼시픽인베스트먼트 등과 함께 부채 상환 방안을 두고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로부터 잠재적 파산 위험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만큼, 회사가 내년 2월로 예정된 만기일에 맞춰 부채를 상환하기 어렵다고 본 것으로 분석된다. 팀헬스는 중소형 병원에 응급, 마취, 외래, 입원 행정 등 일정 분야에 특화된 의료진과 전문가를 파견하는 업체다.
◇ 돌파구 마련 노력도…“어려워도 투자 지속”
시장에선 돌파구를 마련하며 기사회생하는 모습도 종종 포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8년 블랙스톤이 인수한 미국 기반의 CARD(자폐 스펙트럼 장애 센터)는 블랙스톤에 주요 지분을 넘겼던 초대 설립자를 상대로 스토킹호스 방식의 매각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토킹호스는 회생기업이 인수의향자와 공개입찰을 전제로 조건부 인수계약을 맺는 방식을 일컫는다.
앞서 회사는 팬데믹 여파로 최근 1년간 8200만달러(약 1060억원)의 순손실을 입었다며 휴스턴 파산법원에 파산을 신청한 바 있다. 미국 전역에 걸쳐 130개의 센터를 운영하는 해당 기관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은 아동 및 성인을 대상으로 응용 행동 분석 서비스 및 관련 치료를 제공한다.
이 밖에도 지난 2012년부터 KKR이 주요 주주로 활동해온 암치료 서비스업체 제네시스케어 미국 법인은 파산보호를 신청한 상태다. 미국 파산법 11조에 따라 구조조정에 나선 뒤 매각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호주와 미국, 영국, 스페인 등에 암 치료 센터를 둔 이 회사는 지난 2020년 동종 산업의 ‘21세기 온콜로지’를 인수한 후로 부채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자본시장에선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글로벌 운용사들의 의료 산업 투자는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자본시장 한 관계자는 “국내와 달리 해외에선 차입매수 방식을 통한 기업 인수가 빈번하다”면서도 “금리 인상으로 발목이 잡히는 것은 (PE 입장에서)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분간 디폴트에 빠지게 되는 기업이 늘겠지만, 의료산업 성장성은 그 어느 산업보다도 뚜렷하기 때문에 투자는 지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