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가 품었던 407조각의 '산'…생은 곧 채색이더라

오현주 기자I 2022.07.05 00:01:00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
한국미술사에서 홀대받았던 '채색화' 재조명
성파스님 등 근현대작가 60여명 80여점 걸어
동판조각 연결 이종상 '원형상 89117-흙에서'
이건희 기증품 중 12m 최대…33년만에 공개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를 열고 있는 과천관에 내건 일랑 이종상의 ‘원형상 89117-흙에서’(1989). 407개의 동판조각을 연결한 길이 12.3m, 높이 3.7m의 장구한 파노라마는 태초에 산과 물, 세상이 만들어지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다. 33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 소장품 중 한 점. 그중 가장 규모가 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제 막 하늘로 솟구치려 하나. 이 땅에 잠시 머물며 할 일은 다했다고. 긴 몸체를 굽이굽이 감아가며 발아래 엉키고 번진 누런 들과 물을 내려다본다. 그랬다. 용인가 보다 했다. 그 기세가, 세상을 휘어감는 기운이, 달리 보이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한참을 빗나갔다. 격한 몸짓으로 무장한 그 덩어리는 ‘산’이었던 거다.

그저 평범한 산 풍경이 아니어서다. 장장 길이 12.3m, 높이 3.7m에 달하는 장구한 파노라마는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지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정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쳐나가며 동서남북이 자리를 잡았고 그 위를 산세가 달리고 있다. 그 비장함에 더 큰 무게를 얹은 건 역시 ‘색’이다. 누런 바탕에 짙푸르고 검붉은 색을 입은 산, 아니 몸뚱이가 버티고 있으니.

국립현대미술관이 경기 과천시 광명로 과천관에 연 대규모 기획전 ‘생의 찬미’는 이 작품을 화룡점정으로 삼았다. 이종상(84) 화백이 1989년에 ‘빚어’ 완성했다는 ‘원형상 89117-흙에서’다. 작품은 407개의 동판조각으로 완성한 동유화(동판에 안료를 얹어 구워낸 그림)다. 제작한 그해 작가의 개인전에 나왔던 이후 33년 만에 다시 빛을 봤다. 지난해 4월 이건희(1942∼2020) 삼성회장의 소장품 1488점 중 한 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옮겨졌다. 광활한 산세와 마주한 나란 존재는 그저 작은 점인 양 한없이 움츠러들게 만드는, 기증품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기도 하다.

과천관 전시장 한 벽을 가득 채운 ‘원형상’은, 한 조각 한 조각 동판 뒤에 적힌 번호대로 차례로 벽에 걸고 밀착해야 그 처음과 끝이 연결된다. 그 크기가 말해주듯 섣불리 어디 내놓을 수도 없는 그 작품에 대한 감탄은 ‘디스플레이 전문가’의 입에서 먼저 터져 나왔단다. “한치의 틈도 없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마치 맞춤인 양 이렇게 딱 들어맞을 수가 있나.”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을 허리 숙이게 한 성파스님의 ‘수기맹호도’(2012·162×570㎝). ‘대호도’를 재해석해 나무판에 옻칠로 되살렸다. 일제강점기에 ‘대호도’가 그랬듯 어려운 상황을 떨치고 분연히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부터 30대 작가 김선우까지

‘생의 찬미’ 전을 수식하는 또 다른 타이틀은 ‘한국 채색화 특별전’이다. 채색화라 할 땐 보통 ‘색을 칠하는 그림’이란 풀이가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회화사에선 좀더 특수한 영역으로 구분한다. 담백하게 먹만으로 그리는 수묵화와는 선을 긋고, 채색으로 완성하는 궁중기록화, 민화, 불화, 초상화, 장식화 등을 통칭하는 거다.

그렇다고 전시작이 옛 향기 뿜어대는 고색창연 일색인 건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전통 채색화를 시작점으로 60여명 작가의 80여점을 건 전시에는 강요배, 박대성, 박생광, 신상호, 안상수, 오윤, 이종상, 한애규, 황창배 등 근현대미술계 대표작가들이 더 눈에 띈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 전경. 왼쪽부터 이우환의 ‘관계항’(1979·64.8×54.5㎝), 오윤의 ‘칼노래’(1985/1995리프린팅·32.2×25.5㎝), 구본창 ‘호건’(2022·보그코리아 5월호) 등이 차례로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이 ‘채색화’를 기획전 테마로 잡은 건 사실상 처음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조선시대가 수묵·문인화를 전면에 내세운 듯하지만 채색화 전통은 끝까지 지켜냈다”면서 “그럼에도 그 중요성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순수예술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했던 채색화가 소외당하고 홀대받아온 시절을 떠올린 거다. 그 ‘반성’의 자세로 전시는 미술사에서 채색화가 차지하는 지점을 짚기보다 역할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그 채색화가 우리가 살아낸 한 시대마다 도대체 무엇이었나를 살폈다는 얘기다.

김종학의 10폭 병풍 ‘현대모란도’(2006·각 159×49㎝). 오래전부터 장식화의 역할을 한 채색화를 현대적인 화법을 씌워 강하고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 전통적인 괴석이 있는 ‘궁모란도’를 연상시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중 하나가 성파(83)스님의 ‘수기맹호도’(2012)와 ‘금강전도’(2012)다. 성파스님은 올해 제15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된 대종사. 한국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예술가 종정’이라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가로 570㎝, 세로 162㎝ 나무판에 옻칠을 입힌 ‘수기맹호도’는 민화 ‘대호도’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고난에 굴하지 않는 범의 기개를 현대에 일깨운다. 10폭 병풍에 1만 2000봉의 거센 기상을 종이에 한 선, 한 선 옻칠로 그어낸 ‘금강전도’ 역시 시대에 들이댄 날카로운 비수라고 할까.

성파스님의 ‘금강전도’(2012·200×900㎝). 종이에 옻칠을 올려 10폭 병풍으로 제작했다. 돌이 많고 뼈다귀 같아 개골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1만 2000봉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연마를 통해 잡티를 없애고 정수만 남긴 단단하고 날카로운 비수처럼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국 채색화의 대가’란 명칭이 결코 허투루가 아닌 작품도 보인다. 박생광(1904∼1985)의 ‘전봉준’(1985·360×510㎝)이다. 강렬한 색, 굵은 선으로 시대의 표상을 끌어내던 그이의 눈과 붓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멈췄을 때의 작품이다. 장대함으로 따지면 이숙자의 ‘백두성산’(2000)도 빼놓을 수 없다. 눈 덮인 백두산 천지를 가로 10m 길이에 펼쳐낸 작품은 해와 달을 좌우로 두고 세상의 정기를 끌어모으는 중이다. 실제로 지난 100년간 백두산이 겪은 변화를 한 화면에 응축했다는, 그간 접해온 작가의 ‘보리밭 그림’으론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이다.

이숙자의 ‘백두성산’(2000·227.3×909㎝). 대개 부분적인 묘사 외에는 거시적 안목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백두산 전체를 한 폭에 담아냈다. 눈높이를 대기권까지 띄워 구름 위로 나란히 떠오른 해와 달을 거느린 거대한 백두산을 조망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색’을 말할 때 건너뛰면 섭섭할 현대작가도 여럿이다. 그중 최근 미술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30대 작가 김선우(34)의 ‘파라다이스’(2021·227.3×181.8㎝)가 걸려 눈길을 끈다. 작가는 인도양 모리셔스섬에 살다가 1681년 멸종한 도도새를 현대인의 자화상인 양 작업해왔던 터. ‘파라다이스’는 조선 왕권을 상징하는 배경이던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는 그림 ‘일월오봉도’와 장수를 기원하는 대표적 도상 ‘십장생도’를 섞어 도도새의 낙원 같은 일상을 표현했다. 작가 안성민의 ‘날아오르다’(2022)와 ‘라이즈 업’(RISE UP·2022)은 ‘채색화의 역할’을 들여다본 전시취지에 가장 근접한 현대작품이라 할 만하다. 거대하게 키운 부적을 보는 듯하니 말이다. 노르스름한 바탕에 붉은 서체로 ‘날아오르다’와 ‘라이즈 업’이란 글씨를 새기듯 그려넣었다.

김선우의 ‘파라다이스’(2021·227.3×181.8㎝). 조선 왕권을 상징하는 배경이던 ‘일월오봉도’와 장수를 기원하는 도상 ‘십장생도’를 섞어, 작가의 캐릭터인 ‘도도새’가 사는 낙원을 표현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안성민의 ‘날아오르다 : 라이즈 업(RISE UP)’(2022·250×1000㎝). 동서양의 모티프를 한 화면에 담았다. 누런 창호지에 경면주사를 사용해 글을 쓰는 전통적인 ‘부적’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키워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주류에서 홀대받아온 ‘채색화’의 무한변신

높고 넓은 전시장에서 속 시원한 대작의 향연에 푹 빠져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한국미술사에서 묵직하게 한 획을 그은 대가들의 수작을 촘촘히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자리기도 하다. 다시 말해 굳이 장르로서의 ‘채색화’로 한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 의지는 전시타이틀에서 읽었다. ‘생의 찬미’는 ‘사의 찬미’에서 차용한 것. 한국 최초의 여성성악가라 말하는 윤심덕(1897∼1926)이 부른 그 ‘사의 찬미’ 말이다. 우울하고 허무한 세상굴레에 더는 매여 있지 말자는 속뜻을 이렇게 드러냈다고 할까. 생은 장르가 아니라 채색이니까.

서울과 거리가 있는 과천관에서 펼친 전시에도 개막 이후 한 달간 6000여명이 다녀갔단다. 한 작품 한 작품 앞에 관람객이 머무르는 시간이 여느 전시를 뛰어넘는다고 미술관 관계자가 귀띔한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

김혜경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2021·가변설치). 8채널 영상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조선시대 유교철학의 기본윤리를 집약한 ‘효제문자도’와 당시 고가의 안료였던 청화로 그린 청화백자를 통해 물욕과 도덕 사이에 놓인 인간본성의 모순을 말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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